중국,21세기 초강대국?!

중국은 왜 공자를 부정했는가?

朱雀 2011. 1. 1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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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성의 공자묘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현재 중국은 약 88개국에 공자학원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자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우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자의 3천명의 제자들의 장엄한 의식을 통해 ‘공자의 부활’을 화려하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1973년 공자가 몰락한 노예 소유 귀족의 대표인물이라며 제 10차 당대회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그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현의 묘비가 홍위병에 의해 두동강이 났던 일을 돌이켜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것에 버금갈 만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할렐루야!

 

물론 공자의 복권은 1976년 덩샤오핑의 복귀와 함께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차츰 권위를 더하더니 마침내 2000년대가 되면 더욱 활발하게 중국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했다.

 

그런데 여기서 무척 바보스러운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 지금처럼 다시 찬양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애초부터 비판하지 말고 쭈욱 그냥 적당한 선에서 유지했으면 되었을 텐데, ‘왜 중국은 그동안 공자를 부정하고 비판해왔을까?’ 그의 묘비와 유적을 훼손하고 책을 불태울 정도로 말이다.

 

중국 관련 역사서를 살펴보니, 공자에 대한 비판과 전면적인 부정은 공산주의 정권이 처음이 아니었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진시황제때 분서갱유로 유학은 엄청한 화를 입었다. 당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가 유학자들의 비판을 참지 못하고, 관련서적은 불태우고 유생은 산채로 생매장한 대사건이었다.

 

공자는 생전에 주나라를 창건한 주공을 높이 평가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세웠고, 무왕 사후 섭정이 되어 7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반란을 직접 토벌하는 등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정치가라면 그는 나이어린 성왕을 내치고 천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공은 성왕을 보필하고 끝까지 충신으로 남은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그런 주공을 너무나 흠모해서 “오랫동안 주공을 꿈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니 정말로 내가 허약해지고 늙은 것 같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따라서 법가사상을 받아들여 혹독한 정치를 벌이는 진시황제를 당시의 유학자들은 주공과 비교하여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진시황제에겐 단순한 모독이 아니라, 자신과 진나라를 부정하는 비판이었기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정통성과 명분이 걸린 일종의 ‘헤게모니’ 투쟁이었다. 분명히 진시황제의 처사는 상당히 잔인하고 도가 지나쳤지만, 어느 정도는 그에게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제 막 통일된 상황에서 기존의 단단한 조직력과 정통성을 자랑하는 유학자집단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럴 경우 취약한 기반의 제국은 흔들릴 소지가 다분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나라는 진시황제 사후와 동시에 급속도로 해체되고, 한나라가 다시 재통일한 뒤 약 2천년동안 유학은 중국 통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두 번의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저력이 확인되면서, 서구열강들의 먹이감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은 당시 지식인과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패배감과 더불어 반성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중국인들은 ‘중화사상’에 젖어있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오랑캐’라 부르며 우쭐했었다. 그들의 땅은 드넓었고, 문화는 다른 나라에서 배워갈 정도로 뛰어났으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그러나 산업혁명이후 계속 발전해간 서구열강에 비해, 농사를 기반으로 한 기존의 봉건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나라는 허약하기 그지없는 거인에 불과했다. 따라서 아편전쟁과 난징조약과 같은 굴욕적인 사건들은 중국인들의 자존감을 흔들고, 그 대응책을 골몰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그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라 하여, 자신들의 사상은 뛰어나니 서양의 과학기술 등을 배워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청나라는 1905년만 되도 외국에서 유학한 이들이 약 3만4천명 정도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정부가 건립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쑨원이 임시대총통이 되었어도 중국의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베이징을 비롯한 군세력을 자신의 지배에 둔 위안스카이가 결국 임시대총통이 되는 것도 부족해 다시 1914년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 1915년 일본에게 굴욕적인 21개조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락하게 된다.

 

이런 당시의 상황은 중국인들을 한편으론 분노케 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시금 문제해결을 위한 고민에 휩싸이게 했다. 그런 과정에서 1915년 신문화 운동을 촉발시켰다. 천두슈-루쉰-후스 등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근대화의 실패를 전통문화, 그러니까 ‘유교주의의 회귀’로 돌렸다.

 

당시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약 91만 명의 과거합격자가 존재하고, 아직까지 서양에 대한 지식보다 유학의 숭상에서 젖어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따라서 신문화 운동이 벌어진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과학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의 합리적이고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탄생한 것이다. 즉, 과학을 배우기 위해선 그들의 문화를 당연히 배우고 익혀야만 했다. 특히 서구열강의 침탈도 부족해서 한때는 조공을 바치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이후 열강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중국인들은 자극을 받으면서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기존 문화의 대표격인 유학과 그 시조인 공자에 대한 공격과 권위해체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공자는 한시대의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지난 2천년이 넘도록 중국을 비롯한 주변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과거제를 통해 그의 이념을 뼈속까지 채득하게 하면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갈렸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기득권층에게서 ‘패권’을 빼앗아와야 한다. 게다가 서구열강의 침탈과 군벌세력들의 난립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그런 공격은 더욱 극단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1973년 공자의 대한 비판은 엄청나게 격렬해지지만, 이미 그 씨앗은 (적어도) 1842년 난징조약때부터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100년은 중국인들에겐 기억도 하기 싫은 치욕의 역사이니 말이다.

 

  참고: <현대 중국을 찾아서>, <20세기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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