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중국이 엄청난 외환보유고를 쌓아놓는 이유

朱雀 2011. 1. 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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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외환보유고가 무려 2조8500억 달러에 달한다. 2위인 일본이 약 1조 달러 인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다. 개인적으론 왜 이렇게 중국이 미련할 정도로 외환보유고를 쌓아놓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흔히 외환보유고는 ‘많이 쌓을수록 좋은 거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너무 많은 외환보유고는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 -대외자산과 대외부채를 동시에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중 무역적자에 허덕이는 미국의 입장에선 ‘위안화 절상’을 요구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다. 중국 지도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왜 이토록 높은 외환보유고를 고집하는 것일까?

  

관련기사: 中 12월 기준 외환보유고 2조8500억弗

  

나는 그 이유를 지난 역사에서 찾고 싶다. 청나라 왕조 말기-쑨원-위안스카이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각각 이들은 중국의 나름대로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실패했다. 여기엔 각각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동시에 공통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돈’이다!

 

 

먼저 청나라 말기 왕조는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1901년 의화단 봉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일본-러시아-영국-미국-프랑스 연합군은 베이징에 진입하여 의화단을 몰아낸다. 의화단을 인정했던 서태후와 청왕조는 서쪽으로 피신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당시 보상금으로 무려 4억 5천만냥을 지불하기로 했는데, 청의 연간세입이 2억 5천만냥인 것을 감안할 때 정말 뜨악한 금액이었다!

 

중국은 1940년 12월 31일까지 인플레이션을 감안해서 4%이자를 치르며 갚았는데, 무려 거의 10억냥에 달했다(39년간 갚아야 했다). 당연히 청왕조는 빚을 갚고 재정을 꾸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더욱 과중한 세금을 책정할 수 밖에 없었고, 당시 부패했던 관료들은 더더욱 백성들을 쥐어짰다. 이런 악순환 구조는 청나라 왕조의 수명을 줄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출처: <현대 중국을 찾아서>




 

1911년 10월 9일 우한 한커우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된 신해혁명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청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쑨원의 국민당과 위안스카이가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공화국을 열게 된다. 쑨원은 1912년 1월 지지자들의 환호속에 임시대총통에 오르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군사력을 모두 위안스카이가 장악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신해혁명이 계획과 달리 우발적으로 일어나서 미처 쑨원이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없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미 1842년 난징조약 때부터 외세에게 큰 부채를 지고 있었던 점이 크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청왕조의 힘이 약한 틈을 타서, 각 지방마다 군벌들이 제각기 다스리는 분권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쑨원과 지지세력은 자금이 없었다. 이것이 문제되는 이유는 당시의 중국의 부르조아들과 열강들은 그들이 중국에 투자한 것들 때문에, 바른 인물보다 강력한 인물을 원했다. 때문에 쑨원은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총통직을 당시 베이징의 군벌인 위안스카이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쑨원에게서 대총통을 빼앗다시피 한 위안스카이는 곧 본색을 드러내 1916년 1월 1일 제위에 올랐지만,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오래갈 수 없었다. 우선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겨우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 엉망인 중국의 형편상 세금을 걷기가 매우 어려웠다. 위안스카이는 할 수 없이 차관에 의존했는데, 매달 무려 1300만 위안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출처 : <20세기 중국사>


 

 
 

그마저도 일본이 차관을 미끼로 21개조의 굴욕적인 외교문서를 내밀고, 어쩔 수 없이 일정 동의하면서 그의 권력기반을 흔들려버린다. 중국인들은 굴욕적인 외교를 인정할 수 없었고, 이는 전국적인 항의로 이어졌다. 각 성들은 독립을 선언했고, 중국인들은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며 증오심과 적개심을 활활 표출했다. 결과적으로 1916년 6월 6일 위안스카이는 울화병으로 죽고 만다.

 

역사의 교훈은 그 이후로도 계속된다. 국민당 시절, 무능한 정부는 널뛰는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했고, 1949년 중국을 통일한 중국공산당 역시 30년이 넘게 흐르고 나서야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지난 100년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밖에 없는 중국공산당은 외환보유고를 일단 쌓아놓고 보는 것에 열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치 어려운 시절을 보낸 부자가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무작정 쌓아놓는 외환보유고는 생각보다 환율방어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경제활성화에도 오히려 방해만 된다. 물론 중국의 경우엔 워낙 많은 외화를 가지고 있고, 이를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문제라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게다가 미국과의 관계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이는 중국의 커다란 딜레마 중에 하나로 두고두고 지도부의 두통거리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한다면, 중국은 돈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넘쳐서 불행한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도산에는 적자도산 뿐만 아니라, 흑자도산도 있기 때문이다! 2008년 2천억 달러를 쌓아놓고도 외환위기를 겪었던 우리나라를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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