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역사에 빛날 그 이름, 좌종당

朱雀 2011. 4.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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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위키백과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지 못한 청조정은 내분을 먼저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함풍 11(1861) 821일 함풍제가 서태후의 아들 재순을 황태자에 봉한다. 함풍제가 바로 다음날 숨을 거두자, 열하에서 상경한 서태후는 공친왕과 공모하여 11월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이때 증국번은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좌종당을 태상사경에 봉해 태평천국 진압을 명하게 된다.

 

좌종당은 증국번과 오랜 시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전략을 신중히 짜는 증국번과 상황에 따라 긴박하게 움직이는 좌종당의 확연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여기에 한 살 터울의 나이차는 더욱 의견 차이를 강하게 했다. -게다가 좌종당은 다른 이에게 다소 강압적인 면이 있었다-

 

동치 3331일 좌종당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마침내 항주를 탈환하고 평생의 지기인 거상 호설암을 만나게 된다. 호설암은 시대를 볼 줄 아는 장사꾼이었다. 당시 관군유지를 위해 관표를 냈는데. 대다수 상인들은 이를 부도수표로 인식하고 구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설암은 이를 바쁘게 매입했는데, 이유는 관군이 이길 경우 어떤 식으로든 편의를 봐주지 않겠는가?’였다. , 비록 돈을 받지 못할 지라도, 그를 능가하는 편의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라 본 것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좌종당은 군자금 마련에 한참 고생할 때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청나라 말기라 세금은 높고 관료들은 부패하고 백성은 먹을 것이 없어 도적이 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호설암은 2만냥이란 거금을 쾌척했고, 좌종당에게 이는 사막의 단비나 마찬가지였다.

 

좌종당의 활약으로 항주를 점렴하자 증국전의 상군은 719일 태평천국의 수동인 남경을 점령하고, 좌종당은 이홍장과 더불어 1191등 백작에 진봉되었다. 그러나 염군이 있었고, 신강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청조정은 신강지역에 앞서서 가까운 염군토벌에 힘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동치 4(1865) 523일 좌종당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염군을 치게하고, 이홍장을 양강총독 서리에 임명했다. 당시 염군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셍게린친왕의 기마군을 포위해서 섬멸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좌종당은 염군을 토벌하고 서구열강과 대결하기 위해서 무기공장을 세우고자 했고, 조정의 재가를 받아냈다. 이도 부족하게 여겨 그는 조선소까지 세웠으며 여기에는 호설암의 공이 무척 컸다. 그는 120만냥이란 대금마련과 인재확충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그러나 염군의 무리가 섬서의 회족과 반란을 획책하자, 잠시 양무운동을 멈출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좌종당은 섬강 일대를 맡게 되면서 1869년 갖은 고생 끝에 염군을 소탕하게 된다. 그후 좌종당은 회족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애쓰면서 이홍장과 대립하게 된다. 이는 좌종당이 당시 회족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무려 7년동안 32천냥이란 거금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적으로 생각한 좌종당과 일본을 적으로 보고 있던 이홍장은 견해차이로 다툴 수 밖에 없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공방전은 마침내 청조정이 187553일 좌종당을 신강의 군무를 독판하는 흠차대신으로 임명하면서 종결된다. 1876년 좌종당은 신장의 위구르족의 난을 진압하고, 1884년 청불 전쟁 당시에는 72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광서 11년엔 프랑스에게 연달아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베트남을 떼어주는 한이 있어도 조선은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했던 이홍장은 331일 외교의 귀재 증기택(증국번의 아들)을 내세워 조약을 체결한다. 당연히 좌종당은 이에 반발했고, 이홍장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며 점점 그와 대립해간다. 서구열강에 맞서기 위해 해군창설을 논의하던 좌종당은 결국 73세의 나이로 숨지고 만다.

 

쓰러져가던 제국이었던 청나라는 좌종당의 승리로 인해, 체면치례를 하고 제국의 수면을 조금이나마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아울러 그와 대립하긴 했으나, 이홍장 역시 그의 군사적인 승리를 발판으로 서구 열강과 좀 더 유리한 고지에서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비록 성정이 투박하고 약간 거만하기는 했으나, 병법에 밝고 군사를 누구보다 잘 이끌었으며, 패배감에 쌓인 조정에서 불굴의 의지로 당대의 열강인 영국과 러시아가 지원한 신강지역의 반란을 제압한 좌종당의 공은 오늘날 중국이 그에게 빚진 바가 크다 하겠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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