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홍수전은 어떻게 신도를 늘려나갔을까?

朱雀 2011. 4. 18.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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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홍수전이 이름을 바꾸고 바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듭된 낙방에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홍수전이 적극적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진 7년이 더 흘러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권세양언에서 본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로 청나라의 물을 억지로 활짝 열어젖혔다. 신무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성경(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세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양의 범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벼락같은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집과 성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다. 만약 그게 사람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이어진다. 양이의 중국침입은 늘어나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광경을 보게 된다. 뒤이어 사람들은 관리들과 도적들 그리고 양이들에게 시달리며 궁핍하고 굶주리며 말그대로 누더기만을 감싼채 비참한 생황을 영위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눈앞에 두고 말세적 현상이라고 밖에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말세가 가까웠다고 느껴진 홍수전은 7년간의 서당선생짓을 관두고 전도를 하기 위해 나섰다. 물론 여기에는 곡절이 있었다. 홍수전은 우상숭배를 없애기 위해, 집안의 위패와 서당에 있던 공자의 위패를 없앴다. 조상숭배사상이 강력했던 당시에 이는 향리의 신사(사대부)들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행위였기에 홍수전과 권세양언은 함께 비방을 당했다.

 

홍수전은 18444월 초, 두명의 친척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처음에 그들은 불과 160km까지 밖에 나아가질 못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모두들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격론이 오간 끝에 그들은 다시 길을 잡아 이번에 400km밖으로 가고, 그곳에서 야오족을 비롯한 순박한 이들을 만나, 교리를 전하고 약간의 노잣돈을 챙기기에 이른다.

 

1849년까지 홍수전과 그의 일행들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여행을 해서 사방 약 400km, 즉 남방 지역에 영향력을 떨치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조상신을 모시는 중국의 풍습을 무시하는 홍수전의 사상은 지방의 향리들로부터는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된다.

 

따라서 홍수전은 그런 마을에서 나와 보다 외곽인 지역으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 그들이 홍수전의 말에 쉽게 포섭된 것은 그들의 비참한 삶에 있다. 경작할 땅이 없어서 궁박한 곳에 사는 이들은 살기에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이들에겐 갖가지 미신이 전래되어 있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착각에 빠져있던 홍수전은 그들이 두려워해서 경배하는 사당을 뒤집어엎는 용기를 보여준다.

 

게다가 과거시험을 볼 정도로 똑똑했던 홍수전은 마을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직접 붓을 들어 지방관에게 올리는 진정서 등을 작성해준다. 특별한 지도자 없이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그들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고, 무서운 귀신을 물리쳐주며,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홍수전의 행위는 그들에게 신의 사자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쉽게 홍수전의 사상을 받아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더불어 당시 청나라 사회의 어지러움도 여기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아편전쟁이후 배상금 문제로 청조는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징수했다. 게다가 당시 관료들은 부패해서, 가뜩이나 어려운 백성들을 더욱 쥐어짰다. 여기에 더해 홍콩을 비롯한 해적들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비적들이 강을 타고 올라가 백성들을 죽이고 약탈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 이런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사층을 제외한 대다수의 백성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갖게 되고, ‘뭔가 다른 것을 원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만하다. 홍수전의 복음은 바로 그런 시기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이었다!

 

참고 :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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