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태평천국은 언제부터 청나라와 맞서게 되었는가?

朱雀 2011. 4. 19.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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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우리가 흔히 태평천국운동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1850년쯤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홍수전과 그의 일행들은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1845년 자신들을 배상제회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세력권은 점차 넓혀나간다. 지방의 신사층은 배상제회에 반발하고 나선다. 조상신을 거부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사들은 시시때때로 명분을 만들어 배상제회의 신도들을 고발하고, 홍수전과 그 일행들은 그들을 풀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초창기에는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지만, 점차 커져가는 배상제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지방 신사층과 지방관들은 더욱 단호하고 모질게 조치를 취하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의 희생이 점차 늘어나게 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자, 슬슬 홍수전은 청나라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2월 홍수전과 그의 측근들은 군사용어를 말하고, 8-9월이 되면 무장을 한 군사들이 근거지인 진텐지역에 모이게 된다. 그들을 훈련을 거쳐 정예병사로 거듭난다.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한 군사력은 무섭다. 그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무렵, 태평천국에는 소조귀는 예수의 목소리로 양수청은 하나님의 목소리로 불리게 된다. 그들은 접신을 통해 천상의 말을 지상에서 설법하게 되고, 이는 홍수전의 인정을 받아, 그보다 훨씬 권위 있는 것으로 통하게 된다. 홍수전이 훗날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이런 선택을 왜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태평천국군은 벌써 1만 명을 넘게 헤아리게 된다.

 

당시 태평천국의 세력은 더욱 확장하게 되는데, 이는 지방민들과 역설적으로 도적집단들의 참여 덕분이었다. 지방민들은 부패한 관리와 먹고 살기 힘든 사정 때문이며, 도적집단은 너무나 심해진 소탕작전 때문이었다.

 

홍수전을 비롯한 수뇌부는 고민에 휩싸이지만,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일단 결심한다. 청조와의 전쟁이 눈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배상제회는 철저하게 신도를 가려뽑음으로서 순도를 높이려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탁월했음은 멀지 않은 시일내에 판명이 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태평천국군은 정규군이 아니었다. 따라서 인원수만 많을 뿐이지 청나라 정규군과 싸울만한 전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비적떼를 받아들임으로서 전력을 높였고, 석탈해 같은 천재적인 내부 전술가의 활약으로 인해 연승을 거두게 된다.

 

더불어 청나라 조정과 지방관 등의 큰 횡포에 참다못한 광부 1천명이 투항해오는 등의 상황으로 더욱 상황은 태평천국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된다. 당시 중국엔 성벽이 둘러싼 곳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태평천국이 이런 곳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청나라 조정에 언제 일망타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허나 <손자병법>에도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성을 공략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성을 넘기 위해선 공성기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이들의 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부같은 기술자들은 매우 중요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삼국지>등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공사를 통해 강물의 흐름을 바꿔놓아 성안으로 물을 대거나, 땅굴을 파서 성벽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해냈기 때문이다.

 

물론 태평천국군이 언제나 승리만 한 것은 아니다! 청나라 역시 멸만흥한의 기치를 들고, 1만명 이상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을 두려워하여 5만명 이상의 군사를 동원하기에 이른다. 허나 제국말기에 이르면 그렇듯이, 내부부패로 인해 밤만 되면 희하한 상황이 연출된다.

 

태평천국군의 첩자가 청나라 고위장교를 만나 은밀한 교섭 끝에 무기나 식량 그리고 정보 등을 교환받고, 그 댓가로 엄청난 양의 황금이나 은전을 내주는 거래가 이루어졌다. 태평천국군은 이런 교역을 통해 당시 외국의 선진무기들을 도입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키워갈 수 있었다.

 

게다가 홍수전 이하 지도층이 모두 일치단결해서 청나라 군사와 대결을 벌이며 남경까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새로운 역사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1853년 남경을 점령한 홍수전이 천경(天京)’이라 칭하며 감격에 젖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은 이전까지 청나라 군대에게 쫓기며 많은 희생과 댓가를 치러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경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를 삼고, 앞으로 북경의 청나라를 압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경을 얻은 홍수전 일행이 기뻐하기도 전에 그들은 매우 혼란한 상황에 치닫게 된다. 바로 내부권력 투쟁이었다!

 

참고 : <신의 아들 홍수전과 태평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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