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독서의 즐거움

민주주의가 외상이라굽쇼? ‘후불제 민주주의’

朱雀 2011. 10. 1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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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맛나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외상이요~’ 그럼 구멍가게 주인께선 ‘알았다’라고 하시면서, 장부에 기입하곤 했다. 지금 서울에선 상상조차 어려운 풍경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그게 일반적인 풍경이었다.

 

그래서 가게 주인이 바뀔 때면, 외상 장부를 다시 점검하거나, 이사하는 집에서 그동안 밀린 외상을 한꺼번에 계산하는 ‘지금 보면 신기한 광경’이 벌어지곤 했다.

 

필자가 갑자기 ‘외상’을 이야기한 것은, 유시민의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 때문이다. 유시민 씨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후불제를 말했다. 그런데 이것마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말인 것 같아, 외상을 들고 나왔다. 요즘처럼 외상을 볼 수 없는 사회에서 외상 운운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말일까?

 

많은 이들이 그렇지만, 필자 역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매우 엄혹한 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10여년간 거의 무제한적으로 누리던 언론의 자유가 갑작스럽게 막혔다. 미네르바는 단순히 잘 맞는 경제예언을 한 탓에 구속당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촛불시위에 나선 이들은 그들이 유모차를 몬 엄마이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예비군 복을 입던 자봉이건 할 것 없이 모두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곤혹을 치뤘다.

 

아무리 일을 잘했어도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당한 관료들은 모두 하나같이 퇴출당해야 했다. 정연주 KBS 전 사장부터 연예인까지 그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 없다. 많은 이들이 이병박 정권을 보내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그가 이전의 박정희와 전두환과는 달리 쿠테타가 아니라 국민의 선거로 인해 뽑힌 정당한 대통령이라는 사실이다.

 

한나라당과 일부 세력은 그런 논리를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정의’와 ‘올바름’을 운운했다. 우린 10여년간 민주주의 국가에 시민으로 지내면서,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마치 물과 공기처럼. 그런데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자처하는 유시민은 그 이유로 민주주의가 후불제임을 든다. 특히 우리의 상황이 그러하단다. 지겹지만 대한민국이 수립되던 1948년으로 돌아가자! 우리나라는 어떻게 일제로부터 독립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 스스로 광복을 이뤄내지 못했다. 미국이 우리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켰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거저 얻어진 거나 진배없다. 헌법에 쓰여진 여러 조문 역시 미국과 일본의 조문을 적당히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 선조들이 그냥 앉아 있진 않았다. 김구를 비롯한 많은 독립투사들이 상하이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일제와 싸웠고 외교전을 펼쳤으며, 대한민국 건립이후, 1960년 4.19 혁명과 1980년 5.18 광주민주화 항쟁과 1987년 6.10 민주화항쟁 등을 하며 저항하고 투쟁하며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만들어왔다.

 

그러나, 인류가 ‘민주공화국’이란 발명품을 갖게 된 것이 겨우 몇해던가? ‘주권재민(主權在民)’을 말한 로크가 나온 것이 겨우 18세기이다. 그리고 우리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은 지는 겨우 20여년 정도에 불과하다.

 

하여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통령을 ‘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일을 국부이신 대통령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식이다. 허나 그것은 오늘날 세상에서 불가능하다. 왜?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의 힘은 매우 제약적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그저 최고위 공무원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임기도 현재로선 5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적이다. 따라서 시민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후불제 민주주의>가 독특한 것은 오늘날의 문제에 대해 다른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헌번에서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점에 있다.

 

유시민은 인정한다. 오늘날 헌법이 영어와 일어를 적당히 가져와서 보기에도 어렵고 뭔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워 두통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속에 담긴 정신은 우리가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별 감흥 없이 들은 말이지만, 여기에 담긴 위대한 뜻을 되새김질 해보자. 대한민국은 소수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여 국민은 잘못된 행정과 정책에 대해선 항의하고 개선을 요구해야 한다.

 

누군가가 자신들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여론을 왜곡시키거나, 잘못된 정책을 진행하려 한다면 분연히 일어나서 투쟁해야만 한다. 유시민은 말한다. 민주주의는 깨어있는 시민이 늘 정부와 정치인의 행동을 면밀히 감시하고 일깨워야 한다. 불편부당한 권력에 대해선 항거해야 한다고.

 

오늘날 내가 누리는 자유와 행복 등은 어느날 하늘에서 거저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로마시대에 분연히 떨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부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선조들과 민주화를 위해 젊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대학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명박 같은 정권이 가능했을까? 시민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참여정부 시절의 무능을 탓하며, ‘7.4.7공약’처럼 허황되기 이를 데 없는 약속을 믿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성공한 CEO 였으니, 그가 우리집 부동산과 아파트 가격을 올려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부자감세를 통해 상위 1%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살기 어려워졌다. 대한민국의 부채는 세계 4위로 최강국이 되었다.

 

4대강 공사와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비판하는 언론과 개인은 온갖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우린 이 불편부당함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처럼 괜히 구속되거나 누구처럼 경찰서에 불려 다니며 불편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인용한 싯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를 잡아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사민주의자를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체포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대인을 잡아갔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나를 잡아갔을 때는

항의할 수 있는

그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후불제 민주주의>가 에세이로 집필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하다. 이건 이성이전에 감성의 문제이며, 불편부당함에 대한 호소이다. 따라서 아무리 이성이 앞선다고 해도 들끓는 분노를 제어하기 어렵고,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파편화시키는 것이 더욱 나은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불제 민주주의>는 참여정부 시절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유시민은 책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옹호하고, 자신이 국회의원으로 또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한 일에 대해 자화자찬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에서 ‘천상 어쩔 수 없는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최소한 그는 참여정부가 실패하고,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뼈아프게 반성하는 대목을 읊는다. 아울러 국회의원에 재선되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찾는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국회를 채우고 있는 많은 국회의원들과는 다른 부분이라 어느 정도는 인정해주고 싶다.

 

아울러, 시민이 깨어 있어야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고, 이런 악몽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리라는 대목 역시 뼈아픈 지적이다.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이후 민주당을 비롯한 진보정당은 ‘니탓, 내탓’만을 가르켰지, 현실적 대안을 내놓지를 못했다.

 

오늘날 안철수와 박원순으로 대표되는 시민정치 단체가 나온 것은 그러한 기존정치에 대한 반발이자 반성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리라. 스마트폰과 트위터로 무장한 새로운 정치세대는 기존의 정치문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를 꿈꾸고 있다.

 

우리가 그나마 지금 벅찬 상황에 처한 것은 유시민처럼 기존의 실패에 대해 침몰한 나머지 자멸한 것이 아니라, 이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한발한발 나아간 탓이라 여겨진다. 필자가 게으른 탓에 <후불제 민주주의>를 이제야 읽었다. 그러나 2011년에도 <후불제 민주주의>의 외침은 충분히 유효하다고 본다.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개개인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절대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비정규직 동료를 외면하고 장애인을 외면하고 노약자를 외면하고 해외노동자를 무시한다면 우린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없다.

 

 

그들이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수배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민단체 회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유모차 엄마를 기소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전교조를 압수수색했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

나는 방관했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마침내 그들이 내 아들을 잡으러 왔을 때는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시민이 ‘니묄러의 인용문’을 오늘날에 맞게 다시금 개작한 시다. 어떤가? 울림이 세지 않는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국민이 깨어있지 못한 탓에 히틀러라는 괴물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우리가 악의 시스템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스스로 깨어있는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뛰어난 지도자나 영웅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이 서로 서로 협력해서 ‘선(善)’을 이룩하는 것이다. 자고로 가진 것이 없는 시민들이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연합하는 길 뿐이다.

 

‘나 하나쯤 상관없겠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하는 순간 우리는 히틀러의 독일처럼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다른 모든 이야기는 잊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스스로 깨어있는 시민만이 그들의 연대를 통해서만, 불편부당한 정권에 대해 항의하고 격렬히 저항할 때만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는 말은 기억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는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피를 먹고 자라는 꽃’이기 때문이다. 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답지만, 그 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민주주의다.

 

왜? 가진 자는 자신이 가진 것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고, 그들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가진 것 없는 시민들은 맨몸으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죽고 다치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프랑스도 영국도 미국도, 민주주의를 이룩한 나라들은 몇백년에 걸쳐서 수 많은 피를 흘린 다음에야 시민의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필자는 겁이 많고 누군가가 돈과 권력으로 유혹하면 바로 넘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그만큼 오늘날의 세상이 필자같이 연약하고 못난 인물이 피 끓는 우국을 말하는 애국자로 만드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재미없는 긴 글을 읽느라 너무 수고 하셨다. 부디 즐거운 주말되시고, 못난 필자보다 멋진 깨어있는 시민이 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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