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이야기

‘변호인’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

朱雀 2014. 1. 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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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이 개봉 15일만에 누적관객 600만명을 돌파하면서 2014년 첫 1000만 돌파를 예고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 가운데는 변호인이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점 등을 고려해서,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런 열풍의 비결을 찾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2014년 오늘이 과연 1980년대 초보다 사회정의가 실현되었는가?’를 묻고, <변호인>이 극장에서 열풍을 일으키는 것엔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정의감. 잘못된 공권력에 대한 비판 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필자는 며칠 전 지인과 이야기하면서 상당히 파격적인 견해를 듣게 되었다.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그 이야기를 이곳에 적어볼까 한다. <변호인>600만을 넘은 이 시점에서 한번쯤 곰씹어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먼저 송우석 변호사가 진우를 변론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보자! 만약 진우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과연 변호를 했을 것인가? 이게 아무것도 아닌 질문 같지만, 상당히 우리 사회에선 중요한 문제다.

 

영화 <변호인>에선 굳이 송변이 젊은 시절 돈이 없어서 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도망친 사연을 보탰다(아직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전에).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 부산에 내려와서 승승장구하는 그가 오랫동안 그 국밥집을 단골손님으로 출석부를 찍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충분히 정의가 뿌리내렸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대학생들이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있다면 도와야만 한다. 그러나 관객의 정서를 고려한 탓일까? 굳이 송변에게 국밥집이 은인인 사연을 보탰다. 여기가 <변호인>의 첫 번째 문제적 지점이다.

 

<변호인>을 관람하는 이들 가운데는 지난 대선 때 보수적인 성향을 드러낸 많은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자신을 진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들마저 극장으로 끌어내는 <변호인>의 매력에 대해 오늘날 현실을 운운한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누군가가 당신을 위해서 나서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변호인>에선 굳이 잘 아는 사람으로 설정을 했다.

 

오늘날 우린 잘 모르는 누군가가 날 위해서 기꺼이 발 벗고 나서줄 거란 생각을 이젠 영화에서조차 하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송우석 변호사는 빽 없고, 돈 없고, 고졸이다. 철저한 아웃사이더이다.

 

송우석은 같은 변호사들에게 따돌림 당할 정도로 '아웃사이더'다. 그런 그가 국밥집 아들을 변호하는 데는 결국 '아는 사람'이란 사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가 10대 건설사의 스카우트 제의를 포기하면서까지 변론하는 이유 가운데는 국밥집 아줌마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을 뺄 수 있을까? 그런 송우석 변호사의 모습은 2012년 대선 이후 많은 이들을 힐링시킨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굳이 원작을 읽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알 수 있지만 마리우스는 귀족이다. 그런 그가 충분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데도 혁명에 참가하여, 자신이 속한 귀족세력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레미제라블>1862년작인 것을 고려하면, 아직 우리의 현실이 프랑스의 1860년대만도 못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 싶다. <레미제라블>에서 결국 귀족청년 마리우스는 코제트와 결혼한다.

 

이 결말에 대해 오늘날 한국 드라마에서 가난한 여성이 재벌 2세와 결혼하는 것과 뭐가 달라?’라고 반문을 하는 이들도 많지만, 빅토르 위고가 보여주고자 한 것엔 결혼을 통한 계층과의 화해가 클 것이다.

 

마리우스는 귀족청년이고, 코제트는 가난한 여공 판틴의 딸이자, 범죄자 장발장의 수양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결합은 단순히 사랑하는 두 남녀의 결혼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눌 정도로 험악해있던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소수의 귀족층과 다수의 시민이 서로 화해를 하는 미래를 소망하고 그린 것이라 봐야할 것이다.

 

반면 <변호인>은 어떤가? 주인공은 송우석 변호사는 앞서 서술한 대로 아웃사이더다. 어떤 의미에서 아웃사이더가 또 다른 아웃사이더를 위해 변호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는 마지막 장면에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던 송변이 법정에 서자 부산지역 144명의 변호사중 무려 99명이 참여한 것이 자막으로 뜬다. 그러나 동시에 영화의 이런 장면들은 지역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충분히 감동스런 장면이지만 동시에 좀 더 한발 나가고자 했다면 부산이란 지역을 벗어나서 다른 지역에서도 그 재판을 위해 참관하러 온 이들이 있다고 밝혀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꼭 변호사만 밝히는가? 그 지점 역시 고민해볼만 대목이 아닐까?-

 

송변이 애초에 판사를 그만 둔 이유가 무엇인가?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한국사회에서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조차 결국엔 지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민주화 운동이 의미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의를 위해 보여준 행동 역시 의미를 잃지 않는다.

 

다만 한계를 말할 수는 있다. 애초에 송변은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것에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가 대학생들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은 잘 알고 지낸 국밥집 아들이 국보법에 연루되어서 끌려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내가 잘 알고 지낸 애가 그럴 리가 없어!’라는 보편적 정서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변호인>은 보다 많은 이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굳이 그런 설정을 보탰겠지만, 동시에 이런 보편성은 오늘날 우리가 남이가?’란 보편적 정서에서 출발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정부패는 이런 학연과 지연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영화에서조차 송변이 진우를 위해 변호를 맡는 것까지 그런 것에서 시작된다. 한번 생각해봐야 될 지점이 아닐까?

 

 

곽도원이 연기하는 차동영 경감은 분명히 악역이다. 그는 다수를 위해서 얼마든지 소수를 희생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잘못되었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똑같은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선택을 하고 행동할까? 매우 어려운 문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차동영 경감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그러나 민주공화국에선 단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도 없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차동영 경감의 행동과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꺼리를 던지는 문제적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런 정서에 호응하는 것엔 관객의 정치성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변호인>을 관람하는 것과 관객의 정치적 성향은 별다른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변호인>에선 권력자가 나오질 않는다. 기껏해야 검사와 경감 정도만이 나올 뿐이다. 영화속 사건 조작을 지시하는 인물도 따지고보면 하수인일 뿐이다. 영화 마지막에 민주화 운동을 앞장서는 송변의 모습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과 싸우는 듯한, 실체 없는 적과 싸우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권력층이면서 스스로 특권을 포기한 <레미제라블>의 마리우스 같은 인물이 등장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적 한계탓일까? 아니면 작가적 상상력의 부족일까?



우리나라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는 것은 영화관에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와서 보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영화가 관객들의 공통된 정서를 건드린다고 여겨야 한다.

 

우린 흔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우리가 알고 싶은 것만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2012년 대선때 패배했다고 흔히 말하는 49%들은 <변호인>을 통해서 힐링하고 현실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만약 현실에서 불만을 느낀다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현실을 바꿔줄 수 없다. 물론 <변호인>의 열풍은 분명히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고,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영화속 송우석 변호사가 보여주는 자기희생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분명히 오늘날에도 울림이 크다. 다만 그 한계성을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현실적 오판을 하지 않을까 두렵다. 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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