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TV비평

나라면 불의에 맞설 수 있을까? ‘두번째 스무살’

朱雀 2015. 9.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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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스무살’ 3~4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성추행 사건일 것이다. 3화에서 하노라는 신입생 환영회에 갔다가 성교수라는 인물과 조우하게 된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모두들 긴장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노라는 유심히 그를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성교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신입 여대생들옆에 앉더니 어깨를 쓰다듬고, 허벅지를 만지는 등 말그대로 성추행을 했다. 여대생들은 분명히 싫건만 모두들 제대로 거부표시를 하지 못하고, 선배들조차 어떻게 그 행동을 제지하지 못한다.



참다못한 하노라가 ‘성추행’을 운운하자 성교수는 제풀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이 순간 하노라는 영웅으로 신입생들에게 추대된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선배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오히려 그녀한테 (성교수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자 왕따를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드라마지만 성추행하는 교수에게 제대로 거부의사를 표시하지 못하는 여대생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이유는 곧 드러났다. 바로 교수가 학생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대학교는 취업을 위한 준비과정이 된지 오래.



따라서 학점을 잘 받아야지만 좋은 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진다. 게다가 성교수는 기업에 학생을 추천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취업에 목매다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성교수는 차마 거역할 수 없는 존재이자, 절대적인 ‘갑’일 수 밖에 없다.



‘두번째 스무살’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그런 대학생들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차현석이 말했지만 대학생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기껏 힘들게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왔더니, 대학 4년 역시 취업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전락시킨 어른들의 책임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의구현이 되는 사회였다면? 과연 성교수 같은 인물이 대학에 발을 붙일 수 있었을까? 여기엔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회가 되도록 놔둔 어른들의 책임이 크다.




하노라와 함께 공부하는 인문학부 대학생들의 분명히 잘못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게끔 만든 어른들의 책임 역시 크지 않을까? 



하노라의 행동자체는 무척 의미있고 잘한 일이다. 그러나 어설픈 정의구현은 자신은 물론 주변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 하노라의 행동으로 인해서 성교수는 화가 났고, 이로 인해 선배들은 학점관리와 기업추천에 빨간불이 들어오고 말았다.



만약 혼자 용기를 내서 성교수를 성추행범으로 고소내지 고발했다고 치자. 과연 대학생 신분인 그가 교수를 이길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무고죄로 오히려 더욱 곤란한 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스무살’에서 지적하지만 대학생은 철저한 약자의 입장인데다, 심지어 스무살이란 어린 나이탓에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기가 부족할 수 밖에 없다-나이를 막론하고 말이 쉽지 누가 그 상황에서 쉽게 나서겠는가?-.



하노라의 경우는 차현석이 도와줘서, 엄청난 용기를 내고, 게다가 증거물을 확보했고, 그것도 부족해서 차현석이 성교수의 면전에 나타나서 ‘만약 재판이 벌어지면 증인으로 나서겠다’라고 말해서, 성교수가 제대로 입조차 뻥긋하지 못했다-이후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지만 아마 성교수는 하노라와 차현석의 요구대로 사직서를 제출했을 것이다-. 





하노라와 차현석이 성교수에게 사직을 요구하면서 정의를 실현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어른은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어른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잘못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이를 고치기 위해 행동해야되지 않겠는가? 




과연 현실에서 그런 해피한 경우가 벌어질 수 있을까? 증거를 어찌어찌 챙겼다고 해도, 재판을 위해 법정에 가는 것은 일반 사람들에게 어마무시하고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게다가 오늘날 법정은 돈있거나 힘있는 이들에게 (안타깝지만) 매우 유리하다. 안타깝지만 사법정의를 믿는 이들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나마 하노라는 이제 38살의 아줌마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또래인 여학생들이 성추행을 당하는 것을 용기를 냈다. 부당한 것에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정의를 말하는 것은 참으로 쉽다. 그러나 자신의 이익과 생존이 맞물리면 정의를 외치고 실현하기 위해 용기를 내기란 무척 어렵고 힘들어진다.



어설프게 ‘정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드라마적으로 풀어서 보여준 ‘두번째 스무살’의 모습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한 약자의 입장에서 대학생들의 모습을 풀어낸 부분 역시 매우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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