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안타까운 명품드라마의 몰락, ‘클스’

朱雀 2010. 1. 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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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예고편을 보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그냥 <크리스마스에>를 시청하기로 했다. 10화에서 드디어 어렵게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고수와 한예슬의 닭살스런 애정행각이 너무나 행복하게 다가왔다.

온 식구가 함께 살 집을 보여주면서 아이는 둘만 낳겠다는 고수. 그러자 여섯은 낳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오히려 되묻는 한예슬. 예전에는 열명 아니 열두명은 낳았다며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들을 두고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동안 서로를 그렇게 사랑하면서도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때를 떠올리며, 마냥 흐뭇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게 했다.

그렇지만 이전부터 잉태되었던 비극의 씨앗은 결국 두 사람의 눈에서 피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이번에 장벽은 두 사람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뇌종양으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한준수(천호진)은, 자신에게 미안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려는 차춘희(조민수)를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가서 ‘조금만 더 보자’며 붙잡는다. 하필이면, 고수와 한예슬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어찌할바를 모른다.


이렇게 티없이 행복해하는 두 사람을 보는 게 얼마만이던가?

고수는 밤에 자신과 동생을 위해 미리 반찬을 만드는 어머니를 보며 철들도 입에 담지 않았던 그녀의 직업에 대해 험한 말을 내뱉는다. 허나 밤새 고민하며 잠못 이룬 그는 결국 착한 아들답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과 한예슬을 위해 차마 가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신발을 신겨주고 ‘가라’고 한다.

한예슬은 아침에 일어나서 아버지가 사라진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수네 집에 왔다가 눈치로 차춘희와 한준수가 함께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고 울부짖는다. 혼자 남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그토록 어렵게 만났건만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자신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리스마스에>는 막장 앞에서 멈춰섰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을 함께 하기로 했던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길을 가리고 한다. 허나 그 순간 어이없게도 한예슬의 아버지 한준수는 차안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고수가 어렵게 불타는 집에서 구한 한예슬의 어머니는 그를 죽은 아들 한지용으로 착각하고 만다. 이쯤되니 이제 <크리스마스에>에 대한 애정이 문득 사라지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크리스마스에>를 간만에 등장한 ‘명품 드라마’라 칭송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아왔다. 허나 10화부터 <크리스마스에>는 불안한 조짐을 보여왔다. 물론 인정한다. 그동안 멜로 드라마는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스토리와 패턴이 모두 등장한 것을. <크리스마스에>는 나름 기존의 이야기구조를 때론 따라가고 때론 무너뜨리면서 잘 진행해왔다. 여기에 고수의 명품연기와 조연답지 않은 선우선의 연기. 그리고 천호진과 조민수 같은 중년 연기자들의 탄탄함까지 보태져서 그야말로 영화 못지 않은 영상미와 더불러 흡인력 있는 이야기 전개를 보여왔다.

허나 11화에 이르니, ‘약발이 다 되었다’란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필자의 블로그에 방문해 준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또?’라는 감탄사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동안 고수와 한예슬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9년이나 서로에 대한 애정을 말하지 못한 채, 안타깝게 마음에만 쌓아놓고 지냈다.


그런 오해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서로를 위해 서로 희생해온 두 사람은 10화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그동안의 모든 질곡에서 벗어나 서로를 온전하게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근데 11화에선 결국 부모 세대의 문제로 두 사람은 결국 이루어지질 못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서 사각관계를 이룬 선우선과 박태준이 재등장하고 말았다.

선우선은 이제 범서그룹에서 쫓겨나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로, 박태준은 나름 잘 나가는 건축가로 말이다. 12화의 예고를 보니 선우선은 고수의 주변을 얼쩡거리고, 고수는 건축가로 다시 재기하기 위해 박태준과 의기투합할 것 같다.

그리고 고수와 한예슬은 한지붕 아래 살면서도, 정신을 놓은 한예슬의 어머니를 위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감춘채 남매도 연인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지내는 것 같다. 이제 지겹다. 이젠 그만하고 싶다.

드라마인 것도 알고, 나름 이런 상황이 될 수 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끌고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허나 이해하고 싶지 않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련다! 12년이 넘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온전히 가슴에 품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사랑이라면 포기하고 싶다.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매번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질만 하면, 말도 안되는 운명의 장난으로 번번히 맺어지지 못하는 이야기 전개를 더 이상 납득하지 못하겠다.

아마 10화쯤부터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제법 생겨났으리라 본다. 기존의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제작진의 열의는 이해한다. 그러나 두 남녀가 사랑이야기는 어느 정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시청자들은 이해한다. 기존의 공식을 어느 정도 쫓아가도 뭐라고 할 사람은 별로 없다. 아니 <크리스마스에>의 애청자라면 분명 이해할거라 여긴다. 이렇게 굳이 무리수까지 두면서 두 사람의 인연을 번번히 방해하는 것은 시청자의 참을성을 넘어서는 행위라고 밖엔 여겨지지 않는다.


선우선과 박태준의 재등장은 반가움보다 짜증이 앞섰다. 어떻게든 사각관계를 끌고 가겠다는 의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지만, 이젠 그만 내가 <크리스마스에>에 대한 애정을 놓고 싶은 순간이었다.

필자가 보건대 <크리스마스에>는 10화정도에서 끝을 맺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0화를 끝으로 더 이상 볼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선우선과 박태준을 보면서 든 생각은 ‘반갑다’보다는, ‘또?’였다. 결국 네 남녀를 모아놓고 질긴 사각관계를 재현하겠다는 의지로 밖엔 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는 배우들의 명품연기와 기존의 멜로물의 관습에서 벗어난 나름의 신선함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허나 장르적 관습을 깨기 위한 ‘반전을 위한 반전’은 도가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또한 작품 내에서 유통기한이 다된 네 남녀의 ‘사각관계’를 다시 들고 나온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비록 박태준이 한예슬에 대한 마음을 접고, 선우선 역시 그냥 고수를 보기 위해 왔다고 해도 결국 미련은 남은 상태일테니)말이다.

아마 <크리스마스에>에 대한 의리 때문에 12화까진 볼 것 같지만, 그 이상은 보게 되지 않을 것 같다. 한동안 설레임으로 감상했던 드라마가 용두사미가 된 것 같아 매우 아쉽기 그지 없다.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겠다는 제작진의 과욕이 결국 드라마의 완성도를 끝까지 가져가지 못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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