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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1세기 초강대국?! 71

WTO사무총장 나이지리아 후보 트윗으로 드러난 일본의 행태와 엄혹한 국제관계

WTO사무총장 선거에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국격이 상승되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EU가 나이지리아 후보를 지지선언함으로써 대세는 기울었다. 비록 미국이 유명희 후보를 지지선언했지만 너무 늦었고, 아마 우리 입장에선 적당히 시간을 끌어서 미국의 체면을 세워준 다음 사퇴하지 않을까 싶다. 독일 메르켈 총리가 유명희 후보에게 상당히 친화적인 발언을 해서 기대했지만, 결국 독일을 필두로한 EU 회원들은 나이지리아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적극 지지해왔다. 왜 그럴까? 언론보도를 보면 나이지리아 후보는 친중 성향이라, EU가 지지하는 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아프리카가 서구열강들의 식민지였단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자력으로 독립한 게 아니라, 2차대전 이..

계속되는 중국의 6.25 전쟁에 대한 역사왜곡,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항미원조전쟁. 최근 이 단어만큼 우리를 분노케 하는 단어가 있을까? 올해는 6.25전쟁 70주년이다. 미국과 경제전쟁을 진행 중인 중국은 내부 결속을 위해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 전쟁을 그들 멋대로 ‘항미원조전쟁’이란 단어로 왜곡해서 국내외로 선전 중이다. 여기엔 우리에게 익숙한 K팝 스타들도 합류했다. 엑소 레이, 빅토리아, 주결경, 성소 등등. 그들은 자신들의 웨이보에 ‘항미원조전쟁 70주년’ 게시글을 올렸다. 물론 이해는 한다. 중국 연예인들은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안그러면? 혹독한 댓가가 뒤따른다. 그러나 그들이 오늘날 유명세와 인지도를 올릴 수 있었던 건, 한국 아이돌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우리로선 배신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연예인들이 한꺼번에 ‘항미원조전쟁’을..

BTS 관련 상품이 홍콩 독립과 관련 있다고?

중국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BTS논란’은 이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뉴스를 통해서 BTS 관련 상품이 통관 불허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be WATER’가 홍콩 독립슬로건인 ‘be water’가 똑같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였다. 그 주장을 한 이조차 그저 웨이보 일개 이용자에 불과했다. 그저 우연히 같았을 뿐이다. 요샛말로 그냥 뇌피셜이다. 근데 그 주장을 믿고 통관불허라니. www.allkpop.com/article/2020/10/chinese-customs-reportedly-block-bts-merchandise-due-to-alleged-pro-hong-kong-message Chinese customs reportedly block BTS merchandise due to alleged ..

한국이 중국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를 무시했다고?

오늘 뉴스를 둘러보다가 어이가 없어졌다. 환구시보의 영문판인 ‘글로벌 타임스’에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BTS논란을 두고, 한국언론이 선정적으로 보도했다는 둥, 중국인들이 불편함을 느꼈지만 자제했다는 둥.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일삼았다. 특히 ‘중국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란 대목에선 할말을 잃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다. 따라서 인민해방군도 중국군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 군이며, 오직 공산당의 명령만 받는다. 2020/10/14 - [중국,21세기 초강대국?!] - BTS를 공격한 중국 네티즌은 왜 문제인가? BTS를 공격한 중국 네티즌은 왜 문제인가? 지난 7일 BTS는 밴 플리트상을 수상한 이후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은 수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 말했다...

BTS를 공격한 중국 네티즌은 왜 문제인가?

지난 7일 BTS는 밴 플리트상을 수상한 이후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은 수 많은 남성과 여성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 말했다. 밴 플리트 상은 미8군 사령관으로, 1957년 코리아소사이어티를 창립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한 현 상황에서 BTS의 발언은 매우 시의적절했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 네티즌들이 공격해왔다. 중국은 6.25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칭한다. 그들은 북한을 도와 미국에 맞서서 지켜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전쟁에서 희생된 중국 군인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걸 듣는 순간, 우린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지금에야 국교를 맺고 있지만, 엄연한 의미에서 6.25전쟁때 중국(당시엔 중공)은 우리의 적국이었다. 북한이 남..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 시진핑에 주목하라!

불과 몇 년 사이에 우리에게 가장 많이 들리기 시작한 인물을 꼽자면 시진핑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에 등장하는 구문룡 시진을 떠올리게 하는 그는, 놀랍게도 후진타오를 이어 2012년 중국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다. 오늘날 중국의 지도자들이 5년씩 임기를 채우고 물려나는 제도(?)는 제 2세대 지도자인 덩샤오핑 이래 장쩌진-후진타오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따라서 2012년 가을 제 18차 당대회에서 후진타오에 이어 현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주석으로 오를 것으로 예견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에 대해 알려진 바는 아직까지 별로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중국의 지도자는 단순히 중국의 지도자만이 아니다. 바로 옆나라인 우리로선 당장 미국보다 3배 이상 교역량이 ..

당고종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측천무후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당 고종 이치는 유약한 군주였다. 그의 아버지 이세민은 그의 성정이 너무나 염려되어서, 여러번 다른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때마다 장손무기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은 이에 반대했다. 우선, 이치같은 적자 소생이 아니었고, 그들이 보기에 이치가 황태자가 되어야만 훗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이었다. 이치는 그러나 유약하되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다. 자신의 친척인 등왕과 마왕이 부정축제를 통해 재물을 축적하자, 모든 대신들에게 상을 주는 자리에서 둘에게만 상금을 내리지 않고, “두분께선 이미 많은 재산을 축적하셨을테니, 제 상금은 필요없을 겁니다. 마줄을 드릴테니 그걸로 돈꾸러미나 만드세요”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 고종에겐 세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 당태..

측천무후는 어떻게 당고종의 황후가 될 수 있었는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 역사상 그녀가 가장 많이 조명받는 이유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이기 때문이다. 무측천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690년 황제로 오르면서 나라이름을 ‘무주(武周)’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임종시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측천무후’라는 별칭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그녀가 대단한 것은 평민 출신으로 당 태종의 재인으로 들어가서는 그의 사후, 아들 당 고종 이치의 황후가 되었다가 결국엔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사실상 60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그럼 이제 그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사실 측천무후는 원래 당고종의 황후가 될 수 없었다. 위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

중국인들이 수돗물을 마시기 두려운 이유

요새 읽고 있는 랑셴핑의 을 보면 무시무시한 대목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기가 막힌 부분이 있는데, 수돗물과 식량에 관한 부분이다. 먼저 수돗물에 대해서 소개해보겠다. 근래 들어 각 중국 도시는 물값을 인상했다. 2009년과 2010년 동안 전국 35개 도시의 물값이 인상되었고, 하얼빈시의 경우엔 무려 100% 이상 인상되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랑셴핑과 그의 조사원들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중국 지방정부가 외자유치를 위해서 대대적인 활동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프랑스의 베올리아 워터 시스템이 중국의 물시스템을 완벽히 장악한 탓이다. 일례로 2009년 입방미터당 0.3위안을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란저우시의 경우, 2007년 베올리아사와 계약을 체결할 당시, 물값 인상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란저우시..

한나라를 장악한 여태후, 그녀는 누구인가?

를 관심있게 본 이들이라면 기억하겠지만, 여태후는 어떤 면에선 중국 최초의 여황제라 할 수 있는 측천무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여태후는 본래 부잣집 딸이었다. 그런데 유방의 관상을 보고 마음엔 든 그녀의 아버지가 시집을 보내면서 원치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유방은 전혀 ‘황제’의 싹이 보이질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도 아니요, 남에게 다정다감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평생의 친구이자 신하였던 하후영의 얼굴에 장난치다가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서 곤혹을 치루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시정잡배 생활을 하던 그에게 여태후는 마음을 주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후 벌어진 일들도 그랬다. 유방은 훗날 진나라에 대항해서 거병하면서, 집안을 거의 돌보지 않았다. 덕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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