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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1세기 초강대국?! 71

유방은 어떻게 항우를 이길 수 있었는가?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격돌한 를 어린 시절 읽으면서, 어떻게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우는 일단 명문가 출신이었다. 게다가 인품도 고결했으며, 예의가 있었다. 반면 유방은 촌구석 출신으로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다. 그의 이름인 ‘방(邦)’은 훗날 그가 지은 것이며, 실제 그의 이름은 유계였다. 그런데 그 당시 ‘계(季)’는 막내에게 붙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로 치면 ‘유씨네 막내’가 유방의 원래이었다. 얼마나 그의 출신이 한미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항우는 70번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진 적이 없다. 9척 장신에 새까만 오추마를 타고 전장에 나서면 적병들이 그를 보는 것만으로 두려워서 도망칠 정도였다. 그의 마지막 전투를 보아도 수천명을 ..

중국 부자들의 엑소더스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제 우연히 한 경제기사를 보았다. 대충 내용을 요약하면 ‘중국 부자들의 60%가 해외이민을 고려하고 있으며, 3년새 미국 등으로 자산을 옮긴 이들이 무려 4배나 늘어났다’고 한다. 관련기사 : "번돈 다 잃을라" 中 부자들의 '엑소더스' 그러면서 기사는 ‘중국 부자들이 중국 경제에 대해 믿음이 없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하나의 단신이지만, 이걸 보면서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봤을 때, 관련 기사의 말은 10% 정도만 맞는 말이다. 중요한 것들을 많이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공산당 간부와 같은 정치 권력자와 그 지방의 실권자등과 ‘일종의 커넥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다! 따라서 어떤 일을 공적으로 처리할..

왜 태평천국운동은 실패했는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863년 6월 중순 익왕 석달개가 청나라에 투항하고, 1864년 7월 남경성이 함락되면서 태평천국운동은 사실상 종료된다. 홍수전은 운 좋게도(?) 6월 1일 이미 남경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일설에는 남경성이 함락되던 날, 홍수전이 자결했다고 하지만, 이미 청나라측이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하고자 사실을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 이후 기록을 보아도 남경에 입경한 증국번이 홍수전의 시신을 찾아서 형벌을 가하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태평천국운동의 전성기인 1853-54년 경만 해도 군병력만 20만명이 넘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사실 함풍제는 북경을 버리고 도망갈 생각을 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증국번을 비롯해서 좌종당, 이홍장 등의 신진세..

시작도 전에 내부분열에 빠진 태평천국

태평천국의 천왕이자 만세지주였던 홍수전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854년 홍수전은 조서를 통해 세습작위를 태평천국군에게 수여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을 보자면, ‘다섯 왕’의 작위라고 할 수 있겠다. 홍수전은 자신을 천왕이라 칭하며, 만세지주로 했다. 양수청은 동왕에 봉하며 구천세, 소조귀는 서왕에 칭하며 팔천세, 풍운산은 남왕에 봉하며 칠천세, 북왕엔 위창휘를 봉하며 육천세, 마지막으로 군사적인 역량이 출중한 석달개는 익왕에 봉하며 오천세로 했다. 권력은 속성상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갖게 되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한다. 태평천국군 초기에도 그런 양상이 보이긴 했지만, 청나라 군사와 쫓고 쫓기는 전투가 늘상 벌어지는 터라 그런 권력투쟁이 노골적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1856년이 되면 ..

태평천국은 언제부터 청나라와 맞서게 되었는가?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우리가 흔히 ‘태평천국운동’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1850년쯤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홍수전과 그의 일행들은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1845년 자신들을 ‘배상제회’ 즉 ‘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세력권은 점차 넓혀나간다. 지방의 신사층은 배상제회에 반발하고 나선다. 조상신을 거부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사들은 시시때때로 명분을 만들어 배상제회의 신도들을 고발하고, 홍수전과 그 일행들은 그들을 풀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초창기에는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지만, 점차 커져가는 배상제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지방 신사층과 지방관들은 더욱 단호하고 모질게..

홍수전은 어떻게 신도를 늘려나갔을까?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홍수전이 이름을 바꾸고 바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듭된 낙방에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홍수전이 적극적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진 7년이 더 흘러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권세양언’에서 본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로 청나라의 물을 억지로 활짝 열어젖혔다. 신무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성경(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세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양의 범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벼락같은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집과 성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다. 만약 그게 사람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이어진다. 양..

태평천국운동은 성경의 오독에서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의 옥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태평천국운동은 중국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일단 가뜩이나 허약한 청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부쳤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만약 홍수전이 남경에 수도를 정하지 않고,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과 함께 이동하며 북경을 압박했다면 오늘날 중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아울러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소탕하기 위해 청황실은 증국번-좌종당-이홍장 같은 한인관료들에게 병사를 모집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한족 관리에게 문관직은 수락해도 무관직은 주지 않았다. 반란을 염려한 탓이다- 따라서 태평천국운동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격동기 시절의 중국의 온갖 모순과 영웅들의 활약이 펼쳐지는 시절의 이야기라 할만하다...

역사에 빛날 그 이름,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지 못한 청조정은 ‘내분을 먼저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함풍 11년(1861) 8월21일 함풍제가 서태후의 아들 재순을 황태자에 봉한다. 함풍제가 바로 다음날 숨을 거두자, 열하에서 상경한 서태후는 공친왕과 공모하여 11월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이때 증국번은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좌종당을 태상사경에 봉해 태평천국 진압을 명하게 된다. 좌종당은 증국번과 오랜 시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전략을 신중히 짜는 증국번과 상황에 따라 긴박하게 움직이는 좌종당의 확연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여기에 한 살 터울의 나이차는 더욱 의견 차이를 강하게 했다. -게..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천재, 좌종당

청나라 말기에 유일한 승리를 가져다준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증국번과 이홍장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 중에도 좌종당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은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굴욕의 10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바로 1865년 일리를 제외한 신강 전역을 정복한 야쿱 벡 정권을 2년 만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좌종당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가 빛난 결정체, 그 자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중국은 서구열강의 먹이감으로 전락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강지역의 이슬람인들이 반란을 획책해서 정권을 세웠을 때,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 등과 국교를 가질 정도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말이 쉽지 쇠퇴기에 접어든 청나라가 머나먼 신강지역까지 원정을..

혼란한 현대중국에 해법을 제시했던 양계초

양계초 - 이미지출처 : 위키백과 광서 33년(1907) 10월 17일 요코하마에서 칩거하던 양계초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다시 활발한 강연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도중에 수 백명의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난입해서 폭행할 정도로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다. 허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광서 34년(1908)년 상해에 정문사를 만들고 그는 스승 강유위와 함께 국회의 개설을 위한 조속한 청원운동에 들어갔고, 이는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서태후는 정문사를 폐쇄시키나,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부이가 황제에 오르고) 재풍이 섭정왕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재풍은 섭정이 되자마자 원세개를 잘라냈고, 강유위는 크게 기뻐하며 원세개의 죄상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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