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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조약 6

중국 근대화의 시조, 임칙서

한인관료 최초의 흠차대신 임칙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임칙서’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역사에 대해 조금 아는 이라면 ‘아편전쟁’을 떠올릴 것이고, 좀 더 아는 이라면 그가 편찬에 일조해서 훗날 한중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까지 알 것이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임칙서는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흠차대신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청나라에선 임칙서 이전까지, 한인 관료가 문관이 되어도 군사를 이끌 수 있는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멸만흥한’의 기치를 남몰래 항상 지니고 있는 한족을 청조정에서 못미더워한 까닭이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청조정이 한인관료를 우대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임칙서는 4세때부터 공..

원세개,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원세개.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한번은 임오군란때 들어와서 사사건건 간섭을 한 것이요, 두 번째는 중화민국 건국시 총통이 되었다가 결국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결국 일본에겐 21개조 요구를 받고, 중국인들에겐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용납을 받지 못해,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는 ‘위안스카이’라는 중국식 발음 때문에 만주족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의 가문은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후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엔 증국번과 이홍장이 있었는데,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훗날 북양대신을 거쳐 흠차대신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홍장에 의해 창설된 북양군은 원세개의 의해 보다 현대화-제도화 되었으며,..

황제, 드디어 민족시조로 등극하다!

황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중국 지식인 사회는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서로 ‘박 터지게’ 논쟁하게 된다. 바로 중국의 시작을 황제로부터 잡는 ‘황제기년’을 쓸 것인지, 아니면 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자 때부터 잡는 ‘공자기년’을 쓸 것인가? 하고 말이다. 황제기년을 쓸 경우, 중국의 역사는 약 5,000년 정도로 소급된다. 이렇게 될 경우 아편전쟁을 일으킨 이후, 중국 전역을 먹이감으로 삼은 서구 열강들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닌 것이 된다. 지식인들이 신화속의 존재에 불과한 황제를 1900년대에 다시 되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마천이 모든 중국왕조의 시조로 선택한 ‘황제’는 황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거의 이야기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황실을 위한 ..

2010년은 대한민국의 전성기로 기억될 것이다?!

요새 재밌게 읽은 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고르라면, 제목처럼 ‘...우리의 후대는 지금을 한국의 전성기로 기억할 것이다’를 꼽겠다! 는 한국인들이 쓴 21세기 중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예측한 책이다. 최근에 깊은 인상을 남긴 이후 ‘다른 책이 눈에 찰까?’싶었는데, 여지없이 는 제목처럼 필자를 ‘쾅’하고 거침없이 내리쳤다. 현재 21세기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에 대해 나온 책들은 많다. 그러나 그중 대다수는 중국인이나 서구 전문가들이 대부분 쓴 것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보고자 하는 바를 보는 경향이 많다. 나쁜 의미로 말하는 게 아니다. 각자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부분에 대해서 열과 성을 다해 깊이 분석하고 고찰할 수 밖에 없다. 에서 가장 관심 있게..

왜 중국은 100년이나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 -사진출처: 위키백과 중국 관련도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은 왜 아편에서 벗어나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을까?’였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에게 굴욕과 더불어 ‘아편’이 중국에 공공연하게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에서 흑자를 보기 위해 아편을 뻔뻔하게 유통시킨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도 놀랍지만, 그 이후 아편이 중국에 일으킨 문제를 보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까진 맹위를 떨쳤다. 1880년대는 4천만명이 흡연자고 전체 인구의 5%인 2천만명이 ‘중독자’가 될 지경이었으니 그 폐해는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편 때..

중국은 왜 공자를 부정했는가?

산동성의 공자묘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현재 중국은 약 88개국에 공자학원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자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우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자의 3천명의 제자들의 장엄한 의식을 통해 ‘공자의 부활’을 화려하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1973년 공자가 몰락한 노예 소유 귀족의 대표인물이라며 제 10차 당대회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그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현의 묘비가 홍위병에 의해 두동강이 났던 일을 돌이켜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것에 버금갈 만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할렐루야! 물론 공자의 복권은 1976년 덩샤오핑의 복귀와 함께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차츰 권위를 더하더니 마침내 2000년대가 되면 더욱 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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