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남경정부 3

결국 황제에 올라 파멸을 자초하는 원세개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손문은 비록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지만, 견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 것이고, 참의원이 결정한 새로운 대총통은 남경에 와서 취임할 때 현 총통과 국무원들을 해임하는 것, 마지막은 ‘중화민국임시약법’은 참의원에서 제정한 것으로 대총통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손문의 요구조건을 듣고는 곧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세개의 세력권은 북경을 비롯한 북쪽지방이었다. 따라서 그가 손문의 홈그라운드인 남경으로 간다면, 그 위세는 초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참의원들이 정한 임시약법에 따른 것은 총통이 생각보다 그다지 권한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세개..

일본 관동군은 왜 장작림을 암살했는가?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28년 6월 4일 장작림은 북경에서 심천으로 향하던 열차를 타고 가던 중에 차량폭발로 죽고 만다. 이는 당시 일본 관동군이 모의해서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군은 장작림을 ‘폭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제거했을까? 장작림은 잘 알려진 대로 친일파 인사였다. 그는 일본계 인사들과 친분을 두텁게 함으로써 장개석과 최후까지 ‘중국’을 놓고 다툰 일세의 효웅이 되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비록 친일파 인사였지만,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짓’까진 하지 않았다. 장작림은 위태로운 시기에 일본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다스리는 만주지역의 철도권을 넘겨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우선 이는 중국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였다. 또한 당시..

통일 중국을 놓고 장개석과 끝까지 겨룬 장작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장개석은 분열되어있던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장작림과 마지막까지 싸워야했다. 장작림은 동북왕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의 야심은 ‘만주의 패자’가 아니었다. 바로 중국을 통일한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적이었던 오패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승승장구하자 북진해오자, 이를 기회로 삼아 1925년 9월 7일 북경에 입국하고, 11월 30일 안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6월 18일 북경에서 대원수로 취임했다. 장작림이 급하게 대원수에 취임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군의 무력이 너무나 강했다. 장작림과 연합한 군벌 손전방과 장종창이 형편없이 밀려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장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