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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 4

원세개는 어떻게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는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근대사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임시총통이 된 손문이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역사서에선 원세개는 단순히 ‘군벌’정도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군사력이 남다른 것만 가지고는 아무리 허약한 중화민국 초기라해도, 민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원세개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파멸을 자초했지만, 그럴 수 있을만큼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안의 사정은 어때했던 것일까? 자! 이제 이야기를 신해혁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09년 1월 6..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배신으로 청조정의 1인자가 되는 원세개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1895년 원세개는 하남을 관장하는 순무에게서 전보를 받는다. 바로 광서제를 알현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로, 군을 새롭게 개혁해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광서제는 당시 유능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권력에 항상 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일삼던 원세개가 ‘유능한 신하’라는 일부의 주장 덕분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서구열강들의 신식군대의 위력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원세개는 군의 개혁을 소리 높여 주장했고, 광서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군기처에 장경으로 임명했다. 장경의 일이란 ‘고문’ 정도로 그저 2-3일에 한번 정도 군기처에 나가면 되는 한가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권력지향적인 원세개는 이런 직책에 ..

원세개,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원세개.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한번은 임오군란때 들어와서 사사건건 간섭을 한 것이요, 두 번째는 중화민국 건국시 총통이 되었다가 결국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결국 일본에겐 21개조 요구를 받고, 중국인들에겐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용납을 받지 못해,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는 ‘위안스카이’라는 중국식 발음 때문에 만주족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의 가문은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후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엔 증국번과 이홍장이 있었는데,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훗날 북양대신을 거쳐 흠차대신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홍장에 의해 창설된 북양군은 원세개의 의해 보다 현대화-제도화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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