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아편전쟁 9

중국은 왜 100억이나 들여서 ‘공자’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지난 26일부터 중화TV에선 35부작 드라마 가 방송하고 있다. 3회까지 밖에 못 보았지만, ‘상당히 볼만하다’고 평하고 싶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는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이야기 전개에도 현대적 입맛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티가 역력하게 난다. 게다가 우연인지 최근 EBS에서 이 방송중인 탓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욱 그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는 이라면 “왜 2천년전 인물인 공자를 최첨단 시대에 사는 내가 알아야하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좋은 질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MUST 절대적으로 ‘공자’를 알아야만 한다. 공자의 사상은 지난 2천년간 중국은 물론 한자문화권에 속한 아시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TV를 말하다 2011.09.30

홍수전은 어떻게 신도를 늘려나갔을까?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홍수전이 이름을 바꾸고 바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듭된 낙방에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홍수전이 적극적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진 7년이 더 흘러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권세양언’에서 본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로 청나라의 물을 억지로 활짝 열어젖혔다. 신무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성경(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세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양의 범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벼락같은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집과 성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다. 만약 그게 사람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이어진다. 양..

태평천국운동은 성경의 오독에서 시작되었다?

태평천국의 옥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태평천국운동은 중국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일단 가뜩이나 허약한 청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부쳤다는 것에서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만약 홍수전이 남경에 수도를 정하지 않고,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과 함께 이동하며 북경을 압박했다면 오늘날 중국의 역사는 전혀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을지 모른다. 아울러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소탕하기 위해 청황실은 증국번-좌종당-이홍장 같은 한인관료들에게 병사를 모집할 수 있는 ‘특혜’를 주었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한족 관리에게 문관직은 수락해도 무관직은 주지 않았다. 반란을 염려한 탓이다- 따라서 태평천국운동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격동기 시절의 중국의 온갖 모순과 영웅들의 활약이 펼쳐지는 시절의 이야기라 할만하다...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천재, 좌종당

청나라 말기에 유일한 승리를 가져다준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증국번과 이홍장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 중에도 좌종당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은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굴욕의 10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바로 1865년 일리를 제외한 신강 전역을 정복한 야쿱 벡 정권을 2년 만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좌종당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가 빛난 결정체, 그 자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중국은 서구열강의 먹이감으로 전락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강지역의 이슬람인들이 반란을 획책해서 정권을 세웠을 때,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 등과 국교를 가질 정도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말이 쉽지 쇠퇴기에 접어든 청나라가 머나먼 신강지역까지 원정을..

중국 근대화의 시조, 임칙서

한인관료 최초의 흠차대신 임칙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임칙서’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역사에 대해 조금 아는 이라면 ‘아편전쟁’을 떠올릴 것이고, 좀 더 아는 이라면 그가 편찬에 일조해서 훗날 한중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까지 알 것이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임칙서는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흠차대신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청나라에선 임칙서 이전까지, 한인 관료가 문관이 되어도 군사를 이끌 수 있는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멸만흥한’의 기치를 남몰래 항상 지니고 있는 한족을 청조정에서 못미더워한 까닭이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청조정이 한인관료를 우대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임칙서는 4세때부터 공..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왜 아시아에선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증기기관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어린 시절 자주 갖은 의문이지만, ‘우린 왜 서구에 뒤떨어지게 되었을까?’란 물음을 스스로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역사책을 찾아보니, 아시아 문화권은 1800년까지만 해도 훨씬 우월한 문명을 자랑했다. 특히 청나라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을 놓고 따지면 서유럽을 앞섰다고 한다. 그뿐인가? 인구수를 살펴봐도 청나라는 당시 약 3억 8100만명이고, 서유럽은 1억 6900만명 정도 밖에 되질 않는다. 요샛말로 ‘게임이 되질 않는다’ -그 당시엔 전 유럽이 뭉쳐도 청나라를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1839-1842년 사이에 청나라는 아편전쟁에 패해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맺게 되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굴욕의 100년사’를 통과하게 된 것일까? -우리 역시 ..

왜 중국은 100년이나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 -사진출처: 위키백과 중국 관련도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은 왜 아편에서 벗어나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을까?’였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에게 굴욕과 더불어 ‘아편’이 중국에 공공연하게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에서 흑자를 보기 위해 아편을 뻔뻔하게 유통시킨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도 놀랍지만, 그 이후 아편이 중국에 일으킨 문제를 보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까진 맹위를 떨쳤다. 1880년대는 4천만명이 흡연자고 전체 인구의 5%인 2천만명이 ‘중독자’가 될 지경이었으니 그 폐해는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편 때..

중국은 왜 공자를 부정했는가?

산동성의 공자묘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현재 중국은 약 88개국에 공자학원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자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우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자의 3천명의 제자들의 장엄한 의식을 통해 ‘공자의 부활’을 화려하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1973년 공자가 몰락한 노예 소유 귀족의 대표인물이라며 제 10차 당대회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그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현의 묘비가 홍위병에 의해 두동강이 났던 일을 돌이켜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것에 버금갈 만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할렐루야! 물론 공자의 복권은 1976년 덩샤오핑의 복귀와 함께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차츰 권위를 더하더니 마침내 2000년대가 되면 더욱 활발하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