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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운동 8

시작도 전에 내부분열에 빠진 태평천국

태평천국의 천왕이자 만세지주였던 홍수전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854년 홍수전은 조서를 통해 세습작위를 태평천국군에게 수여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을 보자면, ‘다섯 왕’의 작위라고 할 수 있겠다. 홍수전은 자신을 천왕이라 칭하며, 만세지주로 했다. 양수청은 동왕에 봉하며 구천세, 소조귀는 서왕에 칭하며 팔천세, 풍운산은 남왕에 봉하며 칠천세, 북왕엔 위창휘를 봉하며 육천세, 마지막으로 군사적인 역량이 출중한 석달개는 익왕에 봉하며 오천세로 했다. 권력은 속성상 가져보지 못한 이들이 갖게 되면, 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한다. 태평천국군 초기에도 그런 양상이 보이긴 했지만, 청나라 군사와 쫓고 쫓기는 전투가 늘상 벌어지는 터라 그런 권력투쟁이 노골적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1856년이 되면 ..

태평천국은 언제부터 청나라와 맞서게 되었는가?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우리가 흔히 ‘태평천국운동’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1850년쯤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홍수전과 그의 일행들은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1845년 자신들을 ‘배상제회’ 즉 ‘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세력권은 점차 넓혀나간다. 지방의 신사층은 배상제회에 반발하고 나선다. 조상신을 거부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사들은 시시때때로 명분을 만들어 배상제회의 신도들을 고발하고, 홍수전과 그 일행들은 그들을 풀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초창기에는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지만, 점차 커져가는 배상제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지방 신사층과 지방관들은 더욱 단호하고 모질게..

홍수전은 어떻게 신도를 늘려나갔을까?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홍수전이 이름을 바꾸고 바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듭된 낙방에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홍수전이 적극적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진 7년이 더 흘러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권세양언’에서 본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로 청나라의 물을 억지로 활짝 열어젖혔다. 신무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성경(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세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양의 범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벼락같은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집과 성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다. 만약 그게 사람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이어진다. 양..

역사에 빛날 그 이름,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당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지 못한 청조정은 ‘내분을 먼저 수습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러시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북경조약을 체결한다. 함풍 11년(1861) 8월21일 함풍제가 서태후의 아들 재순을 황태자에 봉한다. 함풍제가 바로 다음날 숨을 거두자, 열하에서 상경한 서태후는 공친왕과 공모하여 11월에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이때 증국번은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좌종당을 태상사경에 봉해 태평천국 진압을 명하게 된다. 좌종당은 증국번과 오랜 시간 태평천국군을 진압하면서 자주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전략을 신중히 짜는 증국번과 상황에 따라 긴박하게 움직이는 좌종당의 확연한 스타일 때문이었다. 여기에 한 살 터울의 나이차는 더욱 의견 차이를 강하게 했다. -게..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천재, 좌종당

청나라 말기에 유일한 승리를 가져다준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증국번과 이홍장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 중에도 좌종당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은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굴욕의 10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바로 1865년 일리를 제외한 신강 전역을 정복한 야쿱 벡 정권을 2년 만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좌종당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가 빛난 결정체, 그 자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중국은 서구열강의 먹이감으로 전락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강지역의 이슬람인들이 반란을 획책해서 정권을 세웠을 때,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 등과 국교를 가질 정도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말이 쉽지 쇠퇴기에 접어든 청나라가 머나먼 신강지역까지 원정을..

장개석과 모택동이 모두 존경하는 증국번

태평천국운동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의 최고위층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흔히 강희제를 꼽는다. 그렇다면 현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주석이라 할 만한 모택동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청나라 정계의 거목이 된 증국번이다. 근데 재밌는 점은 국민당을 이끌면서 그와 대결을 펼친 장개석 총통 역시 증국번을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가치관도 다르고 첨예하게 이해가 대립되는 두 사람이 근대격변기의 인물인 증국번을 존경하는 것일까? 태평천국운동은 한동안 중국 공산당에선 위대한 농민운동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고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증국번과 이홍장등은 반대급부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굴욕과 치욕을 견뎌낸 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홍장

이홍장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 근대사를 보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한명 있다. 바로 이홍장이다. 스승 증국번과 함께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화려하게 청조정에 등장한 그는 말 그대로 중국근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일본과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북양군은 훗날 원세개에게 이어져, 그가 손문을 밀어내고 초대총통이 되는 정치적 밑거름이 된다. 젊은 손문은 북양대신인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강유위와 양계초는 그와 어느 정도 의견대립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호장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서태후를 비롯한 청조정의 뒷수습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열강들과 늘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거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조약을 체결한 것이기..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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