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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파 2

혼란한 현대중국에 해법을 제시했던 양계초

양계초 - 이미지출처 : 위키백과 광서 33년(1907) 10월 17일 요코하마에서 칩거하던 양계초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다시 활발한 강연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도중에 수 백명의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난입해서 폭행할 정도로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다. 허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광서 34년(1908)년 상해에 정문사를 만들고 그는 스승 강유위와 함께 국회의 개설을 위한 조속한 청원운동에 들어갔고, 이는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서태후는 정문사를 폐쇄시키나,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부이가 황제에 오르고) 재풍이 섭정왕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재풍은 섭정이 되자마자 원세개를 잘라냈고, 강유위는 크게 기뻐하며 원세개의 죄상을 까..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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