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왜 우리는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가?

朱雀 2011. 3.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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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무속인들이 모시는 신을 보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한명이 바로 관우다! 관우를 민간의 신으로 모시는 이유를 잠시 생각하면 곧 이상하다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 <삼국지>는 우리의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관우를 신으로 받아들여 민간에서 제사를 지내는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그 많은 <삼국지> 인물 가운데 유독 관우만을 받아들였을까? 관우와 무력이 비슷한 조자룡이나 장비 혹은 제갈공명을 모신 이들은 별로 없다. 여기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첫 번째 이유는 시기에 주목해야 한다! 바로 임진왜란 때 왜 관제묘를 모셨겠는가? 바로 당시 우리의 숭배의 대상이었던 명나라에서 조선을 구하기 위해 구원군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여송은 4만명이 넘는 육군을 데리고 내려왔으며, 진린 도독은 5천명이 넘는 수군을 이끌고 이순신 장군과 함께 진두지휘했다.

 

명나라는 제후국인 조선의 구원요청을 받아, 황제국으로써 이에 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의해 조선이 무너질 경우, 곧장 명나라로 쳐들어올 침략군을 맞아야했다. 5만이 넘는 군사와 물량의 동원, 당시 쇠퇴기에 있었던 명나라로서는 국운이 기우는 행위였고,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누르하치가 세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가뜩이나 소중화 사상이 있던 우리가 당시의 역학관계는 고려하지 않고, ‘대국인 명나라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애쓰다가 무너졌다라는 말도 안 되는 선입견을 갖게 되어 더욱 관우숭배사상이 번지는 계기가 되었을 수 있다. 명나라의 입장에선 당연히 당시 일본군은 막아야 하는 적이었고, 자국의 방위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임진왜란을 조선과 일본의 전쟁이 아니라 명나라까지 집어넣어 삼국전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두 번째는 명장 이순신의 활약과 명성에 선조가 시기를 해서 더더욱 보급에 열을 올렸다는 설이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때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한 못난 임금이었다. 임금으로서 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종묘사직을 버리고 떠난 그의 마음은 일그러졌고, 그의 성격은 괴팍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보아도,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탐탁치 않게 여긴 장면을 여러 군데 볼 수 있다. 게다가 임진왜란 당시 이름이 높았던 의장병들이 훗날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거나 유배당하게 된다. 따라서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조총에 맞아 돌아가신 것은 차라리 행복한 결말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의병장 김덕령은 모함으로 인해 역모죄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은 선조를 비롯한 위정자들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는데, 이순신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혁혁한 공을 세우자 이들에 의해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에서 밀어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심지어 선조는 죽은 이순신이 민간에서 으로 숭배받자, 이를 대체하기 위해 명나라 군대에 의해 전래된 관우를 더욱 힘써서 퍼지게 되는데 일조를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세 번째는 관우의 행적과 성격 탓이다. 사실 <삼국지>를 까놓고 볼 때, 관우는 특별히 백성들에게 잘 해준 것이 없다. 특별히 정치를 잘 한 것도 아니고, 뭔가 인기를 끌만한 행동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물론 관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비를 향한 믿음을 지켰다. 조조가 극진한 예로 포로가 된 그를 대접했지만, 결국 다섯 관문의 장수를 베고 유비에게 돌아갔으며, 손권에게 잡혔어도 그의 수하가 되길 거부했다.

 

당시 중국인들이 관우에게 끌린 것은 그의 무력이나 인품 등의 탓도 있지만, 그의 행동이 시원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관우가 <삼국지>에서 맨 처음 큰 활약을 펼친 부분은 사수관 전투에서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당시 관우의 위치는 마궁수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18명의 제후들이 있는 장막에서 그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스타들이 회의를 하는 곳에서 일개 병장이 나서서 적장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나 진배없다. 나관중의 <삼국지>에선 원술이 속 좁은 인물로 묘사되지만, 사실 어디 마궁수 따위가 나서느냐?’라고 화를 내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후로 봐도, 장비가 자신을 부를 때 연인 장비나 조자룡이 상산 조자룡이라고 하는 것과 달리, 관우는 내가 바로 관운장이다! 미염공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마초가 처음 유비군에 들어왔을 때도, 싸워서 이기려고 했고, 나중에 오호장군이 되어서도 마초와 황충이 자신과 비슷한 위치라고 몹시 언잖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관우는 상당히 자존심이 세고, 누군가의 말을 듣기를 몹시 싫어했다. -오죽했으면 관우가 죽을 것을 알고도 일부러 제갈공명이 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있을까?-

 

중국인들은 오랜 전란을 겪으면서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따라서 비록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해주진 않았지만, 별 볼일 없는 유비를 진심으로 따르고 전장에서 무신의 위력을 발휘하는 그를 보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마치 우리가 김연아 선수나 박태환 선수의 활약을 보고 뿌듯해하는 것처럼-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백성들이 별다른 저항감 없이 관제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인들과 비슷한 심리가 아니었을까? 위나라의 조조와 오나라의 손권에게도 절대 꿀리지 않는 그의 모습과 절대적인 카리스마는 못남 임금과 조정대신을 두어야 했던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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