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후진타오도 존경하는 강희제, 그는 누구인가?

朱雀 2011. 3. 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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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초상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얼마 전 대히트한 <시크릿 가든>을 보면 김주원은 사회지도층을 운운하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능력 있게 회사를 운영하며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중국 역대 황제중에서 현대판으로 각색한다면 김주원보다 더 멋진 인물이 바로 강희제가 아닐까 싶다.

 

강희제는 8살이란 어린 나위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한 청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리고 무려 61년이란 기간 동안 통치하며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통치된 군주로 기록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했을까? 정답은 이다!

 

강희제가 남긴 기록을 찾아보면 정사를 돌보느라 시력은 떨어지고, 이는 빠져 제대로 음식도 씹지 못하고, 기력은 쇠해 불평을 털어놓는 인간적인 그를 만날 수 있다.

 

허나 그는 동시에 오늘날 전 장쩌민 주석은 물론이요, 후진타오 국가주석조차 가장 존경한다면서 꼽은 인물이다. 강희제는 탄생 자체가 화합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는 만주족이고, 어머니는 한족이며, 할머니는 몽골족인 그의 가계는 그야말로 중국의 현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청나라 4번째 황제였지만, 그의 재위까지 제국은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다수의 한족은 만주족에게 깊은 불만감을 가지며, 다시금 한족의 나라를 찾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만주족은 한족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상을 서서히 잃어가고, 선대 황제가 나눠준 봉토에서 장군들은 마치 왕인 듯 행사하고 있었다.

 

8살이란 어린 나이에 등극했기에 그는 아버지 순치제가 그랬듯이 오보이가 섭정했다. 정권을 잡게 된 오보이가 점차 횡포를 부리자, 참고 기다리던 강희제는 15살에 되던 해에 결국 오보이를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한다.

 

보다 강한 청나라를 위해 황제의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각 성에 관리를 파견하고자 하자, 이전까지 사실상 그 지역을 다스리던 삼번의 한인장군들은 이에 반발해서 결국 1673삼번의 난을 일으킨다. 이는 아직 제국의 기초를 닦지 못한 청나라에게 치명적이었으며, 거의 성공할 뻔했다.

 

다행히 세 장군의 협조가 긴밀하지 못하고, 약관의 강희제는 (흥분해서 날뛸 만 한대도) 적절하게 장수를 기용해서 운용한 탓에 1681년에 끝맺고, 강남지역을 다시 청황조의 지배하에 두게 된다. 이때 강희제는 놀라운 관용을 베푼다. 주모자외엔 일반백성들을 비롯해 어쩔 수 없이협력한 이들을 용서한 것이다.

 

국내 사극에서도 그랬지만 실제 중국 역사를 보면, ‘반역구족을 멸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한꺼번에 최소 몇천명에서 몇만명이 죽어나는 아비규환 지옥도가 현실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실로 강희제의 인자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대목은 <강희제>를 찾아보면 끝이 없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를 알기 위해 자주 순행을 떠났으나, 결코 백성들에게 폐가 가지 않도록 수행원들에게 지시했고, 인원도 최소한으로 꾸렸다. 음식도 최대한 수행원들과 같은 것을 들었고, 가마가 아니라 만주족의 전사답게 말을 타고 이동했다. 순행중 마주친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기 위해 애썼지만, 그 고충을 들어주느라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하여 일정 시간이 되면 순행길을 재촉했고, 소소한 고민은 뿌리쳤다-

 

강희제는 1683년 타이완을 복속하고, 1689년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사실상 오늘날 중국의 북쪽국경을 확정시키고, 1720년 외몽골 지역의 갈단의 잔당을 소탕하고 티베트를 복종시키며 혼란스러운 청제국을 정리했다.

 

강희제는 만주족 전사답게 강궁을 잘 쏘고 사냥의 귀재였으나, 동시에 한족의 서적을 읽으며 학자들과 토론할 때도 몇수 위의 견해를 보여줄 정도로 학문에도 높은 경지에 오른 군주였다.

 

그는 학문을 사랑했기에 한인 관리들을 시험을 통해 기용해서 관리로 등용했으며, 명실록을 비롯하여 갖가지 저술사업을 지원했다. 자신이 청황제이긴 하지만 명황실을 비롯한 중국 역사에 대해 편견 없이 기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냉철한 군주였다.

 

강희제는 비록 자신은 황제로서 갖가지 골머리를 앓았지만, 백성들이 원하는 삶이 배고프지 않은 행복한 삶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여 뜬구름 잡기 위한 한족왕조의 명분 싸움에 조정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는 물자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백성의 삶이 윤택해 지도록 일정 이상의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사치를 멀리했다. 자식들에게도 수시로 사치를 멀리 할 것을 당부할 정도로 검소했다.

 

만주족과 한족 신하들을 골고루 등용하고자 했으며, 다툼이 생겼을 경우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도록 노력했다. 부정부패한 관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비밀보고체계인 주접을 만들어 활용했고, 환관들이 득세하지 않도록 일정 이상의 관직을 내리지 않고 수도 몇 백명 정도로 제한했다.

 

강희제로 61년 치세로 인해 청나라는 강성해졌고, 이후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이민족 왕조로는 드물게 약 270년이나 번영하게 되는 반석을 닦아놓았다. 강희제는 화합과 포용의 자세를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무력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삶에 폐가 되지 않도록 군사훈련의 목적도 겸하는 사냥을 일 년에 네 번에서 두 번으로 줄일 정도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군주였다.

 

수시로 난을 겪었음에도 사람을 등용하는 데 편견을 갖지 않고자 노력했으며, 죽을 때까지 학문을 힘써 갈고 닥되,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책에서 본대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형시켜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어떤 유럽의 군주보다 넓은 영토를 다스렸고, 그만큼 엄청난 난제들을 겪으면서도 그는 한 번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처리하는 군주의 모범을 보였다. 따라서 오늘날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그를 존경하고 따라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참고: <현대중국을 찾아서> <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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