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한니발은 왜 로마를 상대로 싸웠는가?

朱雀 2011. 3. 21. 07:00
728x90
반응형


한니발 장군 흉상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플루타르크 영웅전>에 보면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다. 카르타고의 실력자인 하밀카르 바르카가 9살인 어린 아들에게 로마를 멸망시키겠다라는 맹세를 신전에서 할 것을 강요한다. 아버지와 마찬지로 로마를 증오한 아들은 맹세를 한다. 그가 바로 로마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넣은 유일한 장본인인 한니발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나라 카르타고는 상업국가였다. 오늘날의 튀니지와 북아프리카를 넘어 스페인-시칠리아-사르데냐섬을 장악했으며, 해상무역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대국이었다. 따라서 당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며 전성기로 향하고 있던 로마와는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두고 23년이나 장기전쟁을 벌인 것은 단순히 카르타고-로마간의 국가전이 아니라, 패권을 둘러싼 두 강대국의 역사적 격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카르타과 로마는 세 번에 걸쳐 싸우는 데, 우린 그것을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그중에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한니발이 활약하는 것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이다. 한니발이 로마와 사실상 조약을 맺은 사쿤툼 도시를 점령하면서 촉발한 전쟁은 이후, 한니발이 예상을 뒤엎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본토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전반기를 자신의 뜻대로 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세상에 떨치게 된다.

 

‘2차 포에니 전쟁이 아니라 우리에게 한니발 전쟁으로 친숙한 것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로마군은 한니발로부터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린 한니발이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에 당시 카르타고와 로마의 국력이 엇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황은 늘 그렇듯 예상과 전혀 다르다! 한니발이 당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보병과 기병을 합해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로마는 당시 7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해상권도 로마가 장악하고 있어서, 한니발은 본국에서 지원을 꿈도 꿀 수 없었다(실제로 그는 적지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했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공격을 감행한 것은 이런 국력의 차이가 컸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이 일방적으로 불리한데도 왜 한니발은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어떤 이들은 단순히 아버지 하밀카르를 들어 어린 시절의 복수를 들먹이지만(게다가 매형 하스두르발도 로마에 의해 암살당한 혐의가 있다), 거기에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 우선 한니발이 아버지 하밀카르를 따라 에스파냐로 건너간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밀카르는 1차 포에니 전쟁의 처리를 위해 카르타고 대표로 협상해야 했다.

 

전승국인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그들은 시칠리아 섬을 빼앗고 전쟁보상금으로 10년동안 3,300탈렌트를 요구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그들은 사르데냐-코리시카 섬을 차례차례 빼았었다. 이는 호전적인 국민성을 지닌 카르타고인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국가인 카르타고에게 치명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상업을 포기하고 에스파냐를 개척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로마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로마는 지중해를 잃고도 점차 국력을 회복하는 카르타고에 불안감을 느꼈고, 심지어 에스파냐를 개척하는데 제동을 걸려고 했다.

 

흔히 하는 말로 도둑도 도망칠 구석은 주면서 쫓아야하는데 로마는 상업국가인 카르타고의 숨통을 계속해서 조이기만 했던 것이다. 뼛속까지 상인인 카르타고의 생업을 거의 빼앗고, 지나친 내정간섭과 반복되는 영토 침탈, 게다가 무리한 전쟁보상금 등은 카르타고인의 적개심을 활활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카르타고의 원로원 의원들이 로마 사절단의 협박에 넘어가지 않고, ‘전쟁불사를 외친 데는, 로마 스스로가 자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 : <칸나이 BC 216>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