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한니발, 칸나이 전투로 전설이 되다!

朱雀 2011. 3. 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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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기원전 216년에 있었던 칸나이 전투는 한니발을 불멸의 인물로 만들어주었다! 일찍이 로마군은 회전에서 항상 강한 면모를 보였다. 칸나이 전투전까지 원로원도 그렇고 한니발과 맞선 로마의 집정관들이 정면승부를 택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는 조그만 도시국가로 출발해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까지 크고 작은 숱한 전쟁을 치루면서 성장해왔다. 따라서 호전적일 수 밖에 없는 로마인들은 한니발이란 강적을 만나기전까진 자신들이 지는 싸움은 상상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한니발 역시 알프스 산맥을 넘어온 이후,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켈트족과 협약을 맺어,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상실한 전력을 보충하고자 하지만, 켈트족은 제의를 거절한다. 이에 한니발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과 타키누스강에서 기병끼리 맞부딪치게 된다.

 

이때 한니발은 누마디아 기병대를 활용해서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로마기병대를 물리쳤다. 이런 그의 무용은 켈트족의 지지를 이끌어내서, 그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때 17살의 나이로 참전하고 있던 스키피오는 재빠른 판단으로 아버지를 구해냈으니, 훗날 자마 회전으로 한니발을 무찌르는 그의 첫 등장은 영광의 역사가 있기까지 괴로움이 뒤따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첫 번째 접전인 타키누스 전투는 그저 기병대끼리의 부딪침 정도였지, 정식 전투로 부르기엔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기원전 218년 겨울, 한니발은 트레비아 지역에서 다시 한번 로마군과 격돌하게 된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병역을 누마디아 기병대로 하여금 공격하게 해서 화나게 만들어서 끌어들였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셈프로니우스는 그런 초보적인 도발에 격노해서 전군을 진군시켰다.

 

그러나 로마군은 차가운 트레비안 강물을 지나면서 전의를 차츰 상실해갔다. 이에 반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은 따뜻한 식사를 마치고 군불을 쬐며, 여유롭게 기다리며 상대를 맞이했다.

 

처음부터 로마군에게 불리했던 트레비아 전투는 누마디아 기병대와 코끼리를 적절히 활용해서 양쪽 날개 진영을 물리친 카르타고군이 로마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군은 무려 약 2만 명이 사망하는 참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어서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플라미니우스가 이끌던 로마군을 트라시메네강에 안개가 낀 것을 이용해 공격해서 무려 25천여명 정도를 격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로마는 이러한 연이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배우지를 못했다. 집정관 파비우스가 한니발과 교전을 피하면서 그의 전력을 소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자, 이를 견디지 못했다. 그리하여 호전적인 원로원 의원들은 파비우스를 집정관에서 끌어내고, 무려 8개의 군단을 신설해서 압도적인 군사적 차이로 한니발을 무릎 꿇리기로 작심한다.

 

이는 로마군으로선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선택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한니발에게 계속해서 참패하고, 확실한 승리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이후 라틴 연합에서 얼마든지 배신자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로마군은 기원전 216년 로마군의 식량창고로 쓰이던 칸나이에서 역사적인 전투를 벌이게 된다. 로마군은 보병 8만에, 기병 6천명이었고, 이에 맞서는 한니발군은 보병 4만에 기병 1만 정도였다. 숫자로만 따져도 2배 였으며. 로마시민들이 참여한 로마군에 비해, 카르타고군은 그동안의 전투로 인해 한니발이 중추병력은 약 1만 명이 조금 넘는 상태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나머지 병력은 켈트족 등이 채우고 있었지만, 이들은 개개인의 역량은 강했지만 군사적으론 통제하기 어려워서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한니발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한니발군 내부에서 심리적인 동요가 생길 정도였으나, 한니발은 특유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해서 겨우 막을 정도였다.

 

로마군은 좌익에 기병대 1,600명과 우익에 바로가 이끄는 기병대 4,800명을 두었다. 이들은 누마디아 기병대를 맞아서 그들을 묶어두는 전략을 고수했다. 이전까지 기병대의 활약 때문에 애를 먹은 로마군으로선 당연한 전술이었다. 그러나 기병대의 전력의 이 너무 차이가 났다. 이들은 초반에는 밀집해서 누마디아 기병대를 적절하게 견제했으나, 한명 한명이 엄청난 기마술과 창술을 지닌 누마디아 기병대를 상대로 끝까지 버텨낼 수 없었다.

 

반면 중앙군은 병력의 숫자와 질에서 단연 로마군이 앞섰기에 카르타고군이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천재인 한니발은 거기까지 계산하고 있었다.그는 로마군의 일자형 대형에 맞서서 사다리꼴로 포진했다. 1열에는 켈트족과 에스파냐군이 혼합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군을 맞서서 최선의 전투력을 선보였다.

 

로마군은 사다리꼴 대형에 맞서면서 일자형 대열을 유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자신들의 이점인 병력수를 활용하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앞에 있던 열은 병력 소모로 인해 가장 뒤로 물려, < 이랬던 모양이 >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허나 켈트족과 에스파냐군의 뒤에는 중무장한 아프리카군, 즉 한니발군의 주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피로해진 로마군을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들었고, 마침 누마디아 기병대의 활약에 밀리던 로마기병대가 무너지자 함께 합세해서 포위해서 섬멸하는 방식을 취했다. 훗날 칸나이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로 인해 로마군은 무려 5만명이 사망하고, 2만명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이 전투로 인해 로마의 남부연합은 로마에서 탈퇴해서, 한니발과 공동전선을 취하게 된다. 그렇지만 로마가 칸나이 전투로 인해 막대한 인적-물자적 손해를 봤지만 이는 훗날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는 밑거름이 된다.

 

우선 로마군은 그동안의 전략에서 벗어나 파비우스식 전략, 시간 끌기로 바뀐다. 이런 전략을 통해 시간을 벌고 전력을 확보하게 된다. 반면 로마에 있으면서 늘어난 전선으로 인해 가뜩이나 전력부족인 한니발은 이전처럼 화끈한 승리를 맛보지 못하게 된다. 그사이 로마는 한니발식 전략과 전술을 익히면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같은 명장을 낳게 된다.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애를 썼고, 실제로 거의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만약, 로마가 칸나이 전투에서 지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한번 더 병력을 동원해서 회전을 벌였다면 멸망했을 것이다. 한니발은 군사적 명성을 획득해서 라틴연합을 붕괴시키고 원하는 바를 달성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결정적인 패배를 통해 배웠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항복을 선택하지 않고 적의 전술을 배우면서, 한니발이 카르타고 본국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했지만 한니발이 싸운 것은 로마의 군사가 아니라 로마의 시스템이었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로마식 시스템은 한니발을 통해서 버그를 발견하고 이를 고치게 되었고, 더욱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로마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당시 성인남성의 1/6이 되는 5만명 이상을 한니발 전쟁에서 잃었으며, 원로원 의원들의 희생과 정신적-물질적 손상도 매우 컸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여러 번 항복했을 상황에도, 로마는 침착하게 대응했고, 이는 결국 로마가 천년제국으로 발돋움시키게 된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로 불멸의 이름을 얻었으나, 오히려 그의 원수인 로마를 더욱더 강력하게 만들었으니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참고 : <칸나이 BC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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