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원세개는 어떻게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는가?

朱雀 2011. 4. 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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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근대사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임시총통이 된 손문이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역사서에선 원세개는 단순히 군벌정도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군사력이 남다른 것만 가지고는 아무리 허약한 중화민국 초기라해도, 민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원세개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파멸을 자초했지만, 그럴 수 있을만큼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안의 사정은 어때했던 것일까? ! 이제 이야기를 신해혁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0916일로 돌려보자!

 

원세개는 이때 은거생활을 시작한다. 사정은 이렇다! 광서제를 배신하고 서태후편에 선 원세개는 승승장구를 거듭해서 이미 나이 50세에 황제가 직접 선물을 내리는 영예까지 얻게 된다. 광서제는 무술변번의 실패이후, 원세개라면 이를 갈았지만, 그는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신의 물건을 내릴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처지였다.

 

또한 원세개는 북양군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자신의 심복들을 권력의 요소요소에 포진시켜 놓아서 탄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성품이 오만방자하고 무례했다. 이런 그의 성정과 행동은 관료들과 황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190811월 광서제에 이어 서태후까지 세상을 뜨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 부이가 등극하고, 아직 어린 탓에 재풍이 섭정을 하게 된다. 재풍은 원세개를 미워했고, 그 주변에는 강유위를 비롯한 신하들이 포진했다. 상황은 원세개에게 불리했다. 하여 그는 은거를 택했다. 그는 자신의 야심을 숨기기 위해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고기를 낚는 촌부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세상을 속이고자 했다. 그러나 뒤로는 권력요소요소에 포진한 부하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때를 기다리며 낙향해서 은거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조조휘하의 유비나 제갈량의 반간계 때문에 낙향해서 때를 기다리는 사마의 등이 겹쳐지지 않는가?-

 

19111010일 무창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당연히 청조정은 난리가 났다. 섭정 재풍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쳐부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지만, 다들 난감해했다. 당시 북양군은 원세개가 아니면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할 수 없이 재풍은 원세개를 재임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그런 명령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군비를 위한 은 4백냥과 12,500명을 모집해줄 것 등의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고, 재풍은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무창에서 시작된 봉기는 삽시간에 퍼져 호남, 섬서성 등이 독립하고, 혁명군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혁명의 열기에 재풍은 너무나 겁이 먹어 융유태후와 부이를 데리고 열하로 도망치려 할 정도였다. 원세개는 자신의 위력을 보여줄 때라 마음먹고 1111일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북양군의 이런 위력은 청조정과 혁명군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원세개는 양쪽에서 모두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반드시 손을 잡고 싶은 인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특히 재풍은 원세개의 위력을 보고선,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당시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고 있었다. 당시 중국인들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조정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구열강들처럼 공화정을 세우고, 학교를 비롯한 각종 신식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열강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원세개는 이런 시대적 상황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기로 작심했다. 처음에 원세개는 입헌군주제를 혁명당에게 제안하고, 자신은 수상을 맡을 작정이었다. 당시 손문 다음의 서열인 악군 총사령관 황흥조차 자신을 지지했기에 당연히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혁명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는 원세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원세개는 다시 한번 무력시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당시 강소, 절강, 안휘, 광서 등이 청황실로부터 독립을 선포해서 남반부는 청황실의 통치권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1116일 원세개는 내각책임제를 조직하고, 한양을 공격했다. 1127일 한양을 점령하고 혁명군은 무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이로서 원세개의 입장은 유리해졌다. 당시 혁명군은 여러 차례 전투를 거치면서 허약해진 상황이었다. 만약 북양군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한층 유리한 상황에서 회담을 진행했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좀 더 인내하기로 했다.

 

122일 강서와 절강의 연합군이 남경을 함락했지만, 중앙정부가 없어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에 각성 대표연합회와 원세개 측은 일단 3일 동안 정전하는데 합의했다. 당시 혁명군은 원세개의 위력을 본지라, 그가 자신들의 편에 서면 청황조를 뒤엎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원세개를 초대총통으로 추대하는데 동의했다.

 

1911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손문은 혁명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귀국했고, 남방에서는 1111일 손문을 임시총통으로 선출했다. 이에 원세개는 자신이 총통이 되지 못할 것이라 여기고 국민회의의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1912년 손문은 11일 중화민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임시이며 원세개에게 넘길 것이라 약속했다. 처음에 원세개는 이를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자신의 군사력을 갈무리하고, 밖으로는 신문사를 매수해서 자신에게 여론이 유리하게 돌아가도록 조작했다.

 

손문은 원세개가 평화회담에 나서지 않자 북벌에 나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왕정위를 비롯한 혁명군 내부에서 손문을 오해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반발을 하자 북벌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후 청황실에선 지루한 공방전이 오고 갔다. 융우태후를 비롯한 종친들은 입헌군주제를 고집해서 허울뿐인 황실이라도 보존하고 싶었으나, 민중은 이를 용납지 않았다. 게다가 처음엔 이를 고집하던 원세개도 나중엔 혁명당에게 암살시도를 당하고 나자, 생각을 바꿔 황실을 겁박해서 마침내 포기하게 만든다.

 

1912212일 융우태후는 선통제의 이름으로 칙령을 내렸고, 260년 청황조는 막을 내렸다. 황제 부이가 퇴위한 바로 다음날, 213일 손문은 약속대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원세개를 임시정부의 대총통으로 추천했다. 이로서 청황조에서 사실상 1인자였던 원세개는, 공화정으로 바뀐 세상에서도 1인자로서 자신의 권력을 지켜내게 되었다.

 

참고: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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