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혼란한 현대중국에 해법을 제시했던 양계초

朱雀 2011. 4.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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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 - 이미지출처 : 위키백과

 

광서 33(1907) 1017일 요코하마에서 칩거하던 양계초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다시 활발한 강연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도중에 수 백명의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난입해서 폭행할 정도로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다.

 

허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광서 34(1908)년 상해에 정문사를 만들고 그는 스승 강유위와 함께 국회의 개설을 위한 조속한 청원운동에 들어갔고, 이는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서태후는 정문사를 폐쇄시키나,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부이가 황제에 오르고) 재풍이 섭정왕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재풍은 섭정이 되자마자 원세개를 잘라냈고, 강유위는 크게 기뻐하며 원세개의 죄상을 까발리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청조는 그런 주장을 모두 묵살했다. 심지어 혁명파가 무장봉기를 시도했을 때조차 철저히 황실인물을 내세운 황실내각을 선보여서 양계초를 비롯한 변법자강파를 크게 실망시키고 만다.

 

시대의 흐름과 당시 중국인의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 청황실에게 돌아온 것은 1911년 무창봉기였다. 무창에서 시작된 봉기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다급해진 청조는 원세개를 다시 불러내어 내각총리직을 부여했다. 양계초는 그에게 기대를 걸고 워싱톤이 되어달라는 축하편지를 보냈으나,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 참혹한 배신뿐이었다.

 

원세개는 시기를 관망하다가 혁명파의 편에 섰고 북경을 제압했다. 강유위와 양계초는 군사를 모아 북경으로 가려 했으나, 이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피눈물을 뿌리며 돌아갔다.

 

그는 이내 다시금 힘을 내서 입헌정당 결성 작업에 들어간다. 1913년 말까지 공식적으로 생겨난 공식단체가 682개였는데, 이들은 제 1차 국회의원선거를 거치면서 4개당으로 줄어든다. 이중 가장 우위를 점한 것은 국민당이었고, 나머지 세 당인 통일당과 공화당과 민주당 연합해서 다투게 된다. 당시 국민당의 영수는 손문과 송교인이었고, 세 당의 실질적인 영수는 양계초 였다.

 

그는 국민당의 급진적인 개혁을 비판하며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지만, 191212월 치러진 선거에서 국민당이 압승을 하고 만다. 19133월 선거에서도 국민당이 절반이 넘는 392석을 확보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원세개는 송교인을 암살하고, 손문 등은 ‘2차 혁명을 일으키나 북양군에 의해 진압되고 만다.

 

양계초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원세개의 내각에 참여한다. 그 나름대로는 화폐조국 총재직을 수행해서 나라의 살림을 펴고 싶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412월 사직하고 만다.

 

이후 양계초는 혼란기에서 나름 최선을 다한다. 황제에 오르려는 원세개를 향해 <이상하다, 국체문제여>라고 하여 통렬히 비판하고, 원세개가 결국 황제에 오르고 1916년 호국군이 조직되자 <광서의 원세개 토벌 격문>을 지어 이들을 지지한다.

 

원세개의 사망 이후, 스승 강유위의 복벽운동에 맞서고, 단기서 내각하에서 재정총장을 맡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방만한 단기서 내각의 움직임과 손문이 남경에서 군정부를 수립하고 북벌에 승리하자, 시국수습에 실패한 단기서와 함께 사직한다.

 

이후 양계초는 칩거에 들어가 <중국통사>에 매달리지만, 불과 1/10밖에 집필하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정계로 불려나온다. 중국침략의 야욕에 불타오르는 일본 수뇌부와 외교 테이블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계초는 만주철도를 요구하는 일본공사의 요청을 분연히 뿌리쳤으며, 파리강화회담에 참여해서 중일간 밀약을 알게 된 후에는 전보를 통해 이 밀약은 윌슨의 14개조에 위배되므로 최소화할 수 있고 다시는 남에게 구실을 주지 말 것이라고 했다. 이는 대중에게 알려지면 북경정부에 압력을 주고, 북경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펼치는 5.4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양계초는 1929119일 숨질 때까지, 선진백가사상을 비롯한 중국 역대 사상의 가치를 역설하며, 서구열강의 문화에만 빠진 중국인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특히 그의 인생 말기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던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중국의 모순은 무력을 지닌 군벌과 대중의 대립에 있다는 탁월한 주장을 내세웠다.

 

양계초는 급변기의 지식인으로서 온몸을 던져 시대를 살았다. 그는 서구열강의 군사력과 물질문명에 압도된 동시대 중국인들에게, 그런 문화의 맹점과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중국인들의 현상황에 맞는 해법을 제시하고자 무척 애썼다.

 

비록 그와 반대편에 섰으나, 손문의 혁명파는 그와의 불꽃 튀기는 논쟁을 통해 자신들의 사상을 가다듬고,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을 건설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장개석과 모택동 모두 양계초의 주장을 듣고 보면서 사상을 형성할 수 있었기에, 어찌 보면 손문보다 양계초가 그들의 정신적 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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