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천재, 좌종당

朱雀 2011. 4. 13. 07:00
728x90
반응형


청나라 말기에 유일한 승리를 가져다준 좌종당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증국번과 이홍장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 중에도 좌종당의 이름을 들어본 이는 드물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은 1842년 난징조약 이후 굴욕의 100년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바로 1865년 일리를 제외한 신강 전역을 정복한 야쿱 벡 정권을 2년 만에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좌종당의 끊임없는 노력과 의지가 빛난 결정체, 그 자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 중국은 서구열강의 먹이감으로 전락해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신강지역의 이슬람인들이 반란을 획책해서 정권을 세웠을 때, 영국-러시아-오스트리아 등과 국교를 가질 정도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말이 쉽지 쇠퇴기에 접어든 청나라가 머나먼 신강지역까지 원정을 가서 다시 중국에 편입시키기란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좌종당은 그런 불가능한 일을 해냈고, 스승 증국번마저 그의 용기와 능력에 감탄사를 보낼 정도였다.

 

좌종당은 181211월 호남성 상음현의 소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젖먹이 시절에 미음을 먹어서 배가 크고 배꼽이 튀어나올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다. 자존심 강한 그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은 이런 집안사정 탓이었다.

 

그는 16세에 이미 부시에 합격했으나, 그해에 어머니가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애썼으나 돌아가셨고, 약값과 장례비 등을 합쳐 200냥을 빚지고 말았다. 방법이 없어서 그는 주씨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당시 시대는 영국의 사주로 신강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아편 수입이 2만 상자가 넘을 정도였다. 의식있는 인물들은 서구열강의 침입을 경고하고 있었다.

 

좌종당은 이 시기에 고염무의 <천하군국이병서>와 고조우의 <독사방여기요> 등을 읽기 시작했다. 훗날 군사를 이끌게 되면 꼭 필요하다고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함께 과거를 준비하던 이들은 쓸데없는 책을 읽는다며 그를 비웃었다.

 

그는 1833년과 1835년 회시를 치렀으나, 연거푸 낙방을 맛봐야만 했다. 호구지책으로 26세부턴 녹강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당시 양강총독이었던 도주는 소금과 조운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좌종당을 알게 되고, 그를 만나면서 자종당의 인품과 능력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도광 19(1839)에 도주가 순직하자, 그의 지인이 좌종당을 아직 어린 아들의 가정교사로 임명한다.

 

좌종당은 도씨집안일을 하면서 임칙서와 도주간의 주고 받은 서찰들을 보게 되고, 더욱 흠모하게 된다. 도광 29(1849) 9월 좌종당은 드디어 임칙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65세의 임칙서는 흠차대신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라 37세의 좌종당이 감히 만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좌종당을 정중하게 맞아 밤새도록 세상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 대해 찬탄하게 된다. 임칙서는 좌종당을 크게 보고 그에게 자신이 그동안 모은 신강과 러시아에 관한 자료를 모두 넘겨주었다.

 

이는 말이 쉽지, 겨우 하룻밤 만나본 사이에 자신이 피땀으로 모은 황금보다 중요한 자료를 넘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모두가 영국을 제 1 위험국가로 볼 때, 임칙서만이 홀로 러시아를 가장 경계했던 상황에서 좌종당이 그의 유지를 이어줄 거라 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너무나 현명한 판단이었다-

 

1850년 도광제가 죽고 함풍제가 즉위했다. 이해 10월 청조정은 병석에 누워있던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재임명해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것을 명했다. 임칙서는 명을 받들고 임지로 가는 도중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1851년부터 태평천국운동은 청조정이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랗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1852년 좌종당은 평소 그를 높이 평가하던 호림익 등의 천거와 호남순문 장량기의 간청으로 그의 참모가 된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는 참모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의적절한 계책을 내고 병참과 군사훈련을 통해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1살 연상인 증국번은 그를 높이 평가해서 마침내 함풍 10(1860)에 드디어 4품관직인 경당이 된다. 좌종당은 관리가 되었다는 기쁨보다 스스로 군사를 모집해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그는 즉시 5천여명을 모집해서 초군이라 칭했다. 석달 만에 군사를 이끌고 증국번을 지원할 정도로 그의 군사능력은 탁월했다. 이해 애로호 사건으로 제 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