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이야기

‘마이웨이’가 한국관객에게 불편한 이유

朱雀 2011. 12.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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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는 내내 감탄사와 탄식이 어우러져 나왔다. 한국 블록버스터 영화사를 새롭게 써온 강제규 감독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의 스토리텔링과 서사구조 그리고 수준 높은 전쟁신 등은 <마이웨이>가 한국을 넘어서서 아시아 시장을 주요한 타깃으로 삼았음을 보여주었고 충분한 가능성을 내비쳤다!

 

장동건-오다기리 조-판빙빙은 물론이요, 김인권을 비롯한 조연들의 연기도 너무나 훌륭해서 마치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부터 40년대까지를 실제로 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잔뜩 들어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러나 작품을 감상하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영화의 완성도가 차라리 낮았으면 마음이 편했을 텐데, 너무나 좋아서 그것 역시 머리와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차차 그 이유를 이야기해보겠다!

 

영화는 두 사람이 맞수로서 만남으로서 시작된다. 어린 준식(장동건)과 타츠오(오다기리 조)는 둘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소년으로서 만나게 되고, 대회에서 서로 맞수로서 호각을 이루면서 정점을 찍는다.

 




여기에 타츠오의 할아버지가 독립군에 의해 암살되고, 조선인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 커진 타츠오가 달리기로서 김준식을 이기려고 함으로써 더욱 증폭된다. 김준식의 경우엔 상대적으로 비참한 식민지 생활을 하는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동시에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는 열망과 책임감으로 더더욱 매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두 청년의 열망은 각기 다른 이유로 좌절된다. 김준식은 어렵게 올림픽 선수 선발전에 나가서 가까스로 신승을 하지만, 일본 주최측의 농간으로 실격패를 당한다. 실력차로 패한 타츠오는 자국의 편파적인 진행에 몹시 혼란스러워 한다. 그건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일본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이웨이>는 잘 알려진 대로 조선청년과 일본청년의 만주-러시아-노르망디를 넘나드는 무려 12,000km의 여정을 담고 있다.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던 두 청년이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기면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진심으로 아끼는 친구사이가 되어가는 과정은 무척 설득력 있고, 21세기인 시점에서 분명히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원하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영화의 메시지가 오늘날 한국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상당히 어렵다는 데 있다. 생각해보자! 올림픽 선수 선발전에서 억울하게 실격패한 김준식은 조선 청년들과 함께 행사장에서 항의하다가 그 일로 인해 노몬한 전투가 있었던 만주지역에 강제로 끌려간다.

 



개개인의 타츠오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인 타츠오도 그럴까? 그리고 그런 타츠오들이 모인 당시의 일본은 또 어떠한가? 군인 타츠오는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분명히 아시아인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오늘날까지 진정성있는 사과나 사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시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그때가 좋았지'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을 정도다. <마이웨이>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이 거기가 아닐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필이면 김준식이 있는 부대에 지휘관으로 타츠오가 오게 된다. 타츠오는 일부러 김준식의 마라톤화를 불태우고, 조선인을 더더욱 괴롭힌다. 심지어 그는 소련군의 기습을 받고 부대가 대패할 상황에 처하자, 총으로 도망가는 이들을 총으로 싸서 죽인다. 영화에서 자세히는 묘사가 되지 않지만, 정황상 그들은 조선인일 가능성이 무척 농후하다.

 

따라서 이후 두 사람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날 정도로 증오하고 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생겼을 때 왜 김준식은 타츠오를 죽이지 않았을까?

 

어린 시절의 정 때문에? 똑같은 살인귀가 되고 싶지 않아서? 영화에서 김준식은 끝까지 그 이유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어린 시절 타츠오를 처음 만났을 때, ‘좋은 달리기 친구 한명이 생겼다라는 식의 답변을 한다.

 

김준식의 그 대사는 아직 1945815일 광복절 이후 발전이 없는 한일 양국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타츠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독소전쟁의 총알받이로 소련군에 의해 끌려나감으로써 관동군 대위로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보게 된다. 그리고 처절하게 반성하게 되고, <마이웨이>는 그 지점에서 일본군의 잘못에 대해 그 어떤 말보다 글보다 더욱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불편한 것은 왠지 흐지부지하게 김준식이 그를 용서한 것 같은 행동때문이다.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타츠오를 챙기고, 끝까지 타츠오를 살리고자 애쓰는 그의 모습은 한 인간의 모습으로선 매우 감동적이지만, 오늘날 한국인으로선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1,000회를 돌파했지만, 일본측은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 동상을 철거하라고 요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교토에서 있었던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청산되지 않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양국 정상간의 신경전은 몹시 날카롭게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마이웨이>는 분명히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고 스케일도 큰 영화다! 그러나 아직 이런 영화를 받아들이기엔 한국 관객들은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왜냐하면 아직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말한 것처럼 한 사람의 타츠오나 개개인의 일본인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전장에 끌려나와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국가로서 정부로서 일본은 한국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 전체에 분명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영화에선 타츠오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김준식에게 용서를 빈 장면이 전혀 없다.

 

물론 그런 장면을 굳이 삽입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짓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장면들로 얼마든지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 영화보다 뒤떨어진 시점에서 타츠오의 사죄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자 장면이었다!

 

? 아직 피해자 입장인 한국관객의 상황에선 타츠오 개개인을 이해할 순 있어도 그의 진정성 있는 사과 장면이 없다면, 그를 용서하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성보다 감성의 지배를 받는다. 타츠오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타츠오가 김준식 대신해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유치하고 불필요해 보여도 제대로 고개를 숙이고 참회하는 모습이다.

 

21세기가 10년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이미 60년도 넘게 지난 역사적 사실에 한국과 일본이 얽혀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건 개개인이 노력하거나 영화로서 매듭을 어느 정도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병사인 김준식이 대위로서 책임져야할 위치에 있는 타츠오를 용서하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마이웨이>는 순 제작비만 280억원이 소요된 대작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천만관객이 돌파한다고 해도 본전 치기도 어려울 것이다. 오다기리 조를 장동건과 더불어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은 일본 시장을, 판빙빙을 등장시킨 것은 중국시장을 어느 정도 노린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진보적인 메시지는 오해되고 곡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에서 밝힌대로 아직 일본은 사죄하지도 않았고, 사죄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대지진과 원전사고 이후 더더욱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웨이>는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에겐 반전영화로, 우리에겐 뭔가 당시 일본정부와 일본군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참으로 안타깝다.

 

<마이웨이>가 만약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지고 난후, 제작되고 개봉되었다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며, 21세기의 새로운 한일관계를 이루는 좋은 초석이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 때문에 <마이웨이>는 오해당하거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한 관객조차 필자처럼 불편한 마음을 호소할 수 밖에 없으니...그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탓에 영화의 작품성과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점이 더더욱 마음에 걸린다. 제대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시대적-정치적 상황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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