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TV비평

판타지를 가장한 철학드라마! ‘아랑사또전’

朱雀 2012. 9. 27.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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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드라마중에서 아랑사또전처럼 필자를 당혹케한 작품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1~2화때는 숨가쁜 전개로 웰메이드를 기대하게 해놓고 나선, 정작 본편에 이르러서는 뭔가 지지부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아랑사또전>의 전개를 보고 있노라면 강문영의 정체도 그렇고, 신민아를 놓고 벌이는 3각관계도, 옥황상제와 홍련의 대결도 20부작이란 길이로 담기엔 너무 짧은 이야기라 여겨진다. 지금의 반으로 줄여도 어딘가 느슨한 이야기 구조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사또전>은 단순히 인기를 끌기 위해 이야기를 질질 끈다고 혐의(?)를 갖기 어려웠다. 우선 천상선녀였던 껍데기로 쓰고 있는 강문영을 봐보자! 그녀는 천상의 존재임에도 인간이 되고 싶어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으로선 영원한 삶을 살고 선녀라는 엄청난 직위(?)에두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살고자 하는 홍련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오빠이자 저승사자인 무영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인간의 삶을 탐했고, 인간의 육신을 쓰는 순간부터 욕망의 고리에 빠져들고 말았다.

 

선녀였던 그녀가 인간이 된 순간부터 영생이 아닌 필멸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영원히 살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마치 자가용처럼 갈아타면서 인간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옥황상제가 홍련을 죽이기 위해 무영에게 준 칼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영만이 홍련을 제거할 수 있는 이유가 혈육이기 때문에, 혈육마저 찌를 수 있는 강렬한 의지만이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뭔가 큰 은유를 지니고 있지 않는가?

 

<아랑사또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뭔가가 결핍된 인간들이다. 이준기가 연기하는 은오의 경우, 반쪽짜리 양반신세다. 그가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신의 서출이란 신분적 한계와 더불어, 세상에 대한 체념과 분노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역적이란 멍에를 짊어지고 복수만을 꿈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엄청난 인물이다. 그런 은오가 아랑을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서서히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최대감에 맞서서 밀양 백성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이고, 아랑을 천상에 보내기 위해 그녀의 죽음의 이유를 알고자 한다.

 

주왈역시 은오 못지 않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는 본래 양반이 아니라 천출이었다. 소의 여물을 훔쳐먹을 정도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인간답게살기 위해, 홍련을 위해 처녀를 구해서 바치는 끔찍한 일을 하게 되었다.

 


천상의 선녀로서 고귀한 삶을 살아가던 홍련은 무슨 이유엔지, 인간이 되길 원했고, 그 결과 영원의 삶을 살기 위해선 인간의 육신을 갈아타는 괴물이 되고 말았다.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 상황. 뭔가 역설적이지 않은가?


주왈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한 역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홍련에게 순결한 처녀를 바치는 인신공양을 함으로써 양반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제대로 된 인간의 삶일까?



대신 그는 홍련에게 “...헌데 넌 뭘 달라 하지 않았어. 그저 사람으로 살고자 한댔어...따뜻한 집에 따뜻한 밥에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거라고 했어주왈은 인간이하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식주가 만족되는 삶으로도 인간의 삶이라 생각했다. 권력이나 재물을 탐했던 이전의 심부름꾼과 달리 소박한 주왈을 위해 홍련은 기꺼이 어미가 되어주고, 최대감의 양자로 입적해서 양반의 삶까지 살게 해주었다.

 

그런데 주왈은 아랑을 사랑하게 되었고, 아랑의 몸을 가지고 영원한 삶을 살려는 그녀에게 가장 큰 것을 달라고 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전까지의 심부름꾼과 달리 뭔가 달라하지 않았던 주왈이 가장 큰 것을 달라고 하는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왈 역시 인간답게 살기위해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인간은 본디 자기 주변의 인물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고, 인류애와 사명감같은 감정도 가정에서 시작된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과 정을 느끼면서, 다른 이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다.

 


반쪽짜리 신기를 가진 무당 방울 역시 결핍된 인물이다. 무당이 은오처럼 귀신을 보지도 못하고 신기도 없다는 것은 웃기면서, 동시에 슬픈 일이다. 그가 제 역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아랑사또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제일 인간적인 인물은 돌쇠다! 그는 자신의 혈육관계가 아닌 도련님을 생각하고, 다른 이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며,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씨도 갖고 있다. 가장 인간다운 그가 노비라는 사실은 정말 역설중에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은오와 주왈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라 할 만 하다. 그들은 결핍된 영혼들이다. 은오와 주왈은 여태까지 어떤 여성을 사랑할 수 없었다. ? 사랑이란 무언가를 주고도 혹시 덜 주지 않았는지 생각하는 마음이다. 결여된 삶을 살아온 그들로서는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아랑을 통해 그들은 각각 사랑이란 원초적 감정을 느끼고, 인간다운 삶을 욕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욕망의 화신인 홍련과 최대감은 많은 것을 의미하는 듯 싶다. 홍련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옥황상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400년이나 쓴 부적은 자그마치 하늘을 가리는 부적이다. 이는 자신의 악행을 하늘에 가리기 위함이다. 무언가 연상되는 있지 않은가? 권력자들이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멋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 그러나 하늘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행적을 왜곡해서 기록하는 등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은오는 아랑을 천상으로 보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의 육신을 찔러야만 하는 잔인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주왈 역시 아랑을 위해서 언젠가 어머니 홍련을 배신해야하는 기로에 처해있다.

 


서출로 태어나서 반쪽짜리 양반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그가 밀양에서 사또가 되버린 상황은 그 자체로 역설적이다. 그가 어머니외에 다른 여자인 아랑을 사랑하게 되고, 그로 인해 비극이 예고되고 있지만, 그가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성장하기 위해서 어쩌면 그것은 당연히 거쳐야할 고난일지도 모르겠다.


<아랑사또전>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등의 지극히 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은오와 주왈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사랑을 꿈꾸고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진 최대감은 다시 한양으로 올라가서 정계를 지배할 생각만 가득하고, 선녀였던 홍련은 영생을 원하고 있다. 이런 인간 군상들의 모습은 <아랑사또전>이 판타지의 탈을 쓰고. 시청자들에게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가운데 이토록 돌직구로 철학을 논하는 드라마가 있었던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드라마적 재미가 떨어지는 데도 이런 묵직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제작진의 뚝심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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