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이야기

‘설국열차’를 보고 나면 왜 찝찝할까?

朱雀 2013. 8. 1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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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찝찝하다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었다. 거기엔 작품이 가지는 문제의식과 뭔가 많은 것을 생각케 하는 후반부-정확히는 윌 포드와 만나는 장면부터-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필자는 제 멋대로 설국열차라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는 물론이요, 관련자료는 거의 찾아보지 않고 쓰는 것이기에 틀릴 가능성이 무척 농후지만, 이런 식의 리뷰가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영화란 개봉이후에 감독이 아니라 관객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냐?’에 따라 의미와 깊이를 가지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본 리뷰는 영화에 대해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다량 함유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관람할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란다-

 






<설국열차>에서 관객들이 가장 경악하게 하는 장면은 윌 포드와 꼬리칸의 성자 길리엄의 관계일 것이다. 열차의 완벽한 제어를 위해 반복적으로 반란을 유도하는 윌 포드와 이에 호응하는 길리엄의 관계는 권력자의 속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한다.

 

아울러 윌 포드의 말에 현혹되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의 커티스의 모습은 윌 포드=길리엄=커티스라는 묘한 공식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커티스는 꼬리칸의 반란을 주도하는 인물로 리더로서 각광을 받지만, 그 자신은 17년 전에 에드가 어머니를 죽일 정도로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던 인물이다.

 

길리엄은 자신의 한팔을 내줄 정도로 성자로 추앙받았지만 그 역시 설국열차를 유지하기 위해 꼬리칸의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 정도로 끔찍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왜 길리엄은 윌 포드에게 협력하고, 커티스는 윌 포드에게 현혹될 수 밖에 없었는가? 여기엔 열차라는 공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세계다. 그렇지만 이건 자연이 아니라 윌 포드가 만들어낸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수와 그에 비례해 식량과 물을 늘릴 수 없는 열차라는 공간의 한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설득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특히 식량이 없어서 서로를 죽여서 그 시체를 먹을 정도로 끔찍한 시간을 보냈던 커티스에겐 엄청난 설득력을 지닐 수 밖에 없다.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아온 그로선 식량이 없는 순간은 떠올리기 조차 싫기 때문이다.

 

그런 커티스에게 경종을 울리는 이가 누구인가? 바로 5살난 꼬리칸의 아이들이다. 인류가 멸망하고 끝없이 달리는 열차에서 부품이 없어서 작고 좁은 틈으로 끊임없이 열차를 조율해줘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런 착취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산업혁명 초창기 영국에선 빈민가의 아이들이 방직기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이물질을 제거하거나, 굴뚝에 들어가 청소를 하는 일이 흔한 광경이었다. 당연하지만 굴뚝과 방직기 사이는 좁기 때문에 채 열살도 안된 어린이들이 엄청난 노동을 끝없이 강요받아야만 했다. 21세기는 오늘날엔?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에 가면 어린아이들이 몇달로 안되는 돈으로 하루 종일 일하는 광경을 우린 TV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처럼 초창기부터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나라들을 살펴보면, 자국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부동산을 이용해서 자본가들이 부를 독점했다.

 

그리고 자국민들이 참지 못하고 파업 등을 통해서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자,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고, 그 유명한 식민지들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설국열차>에서 보여주는 열차라는 공간에서 칸에 따라서 나눠지는 인간의 등급분류는 이미 몇백년이 넘은 전통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혹은 현재 인류가 가진 이 구조적인 모순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설국열차>는 여기서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열차라는 공간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커티스가 한계를 가지는 것은 열차라는 공간안에서 꼬리칸의 사람들을 현재의 억압된 상황에서 그저 해방시키는 것이다. 거기엔 어떤 철학이나 대안등이 전혀 강구되어 있지 않다. 충분히 이해는 간다.

 

그는 17년 동안 꼬리칸에 갇혀 살았고, 그저 복수혁명만을 꿈꾸고 살았다. 그렇기에 그는 윌 포드의 말에 너무나 쉽게 설복된 것이다. 그에겐 애초에 철학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생각치 못한 문제를 윌 포드가 치고 나오고, 그가 열차라는 공간의 한계성과 자신의 통치방법의 정당성,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물려주겠다고 나오자 그는 감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열차의 문을 열어주던 남궁민수가 문을 폭파하려는 대목을 생각해보자! -그 장면은 '열차'가 의미하는 자본주의 같은 현 인류의 체제자체의 전복을 의미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가?-


또한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는 어딘가 비밀을 많이 간직한 인물이다. 남궁민수의 말로 추측해보면 커티스보다 앞서 ‘7인의 반란을 일으켰던 이누이트족 여자는 요나의 엄마일 가능성이 높다.

 

거의 마지막에 요나가 에스키모 복장을 한 장면 등을 보면 그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고 본다. 열차의 2인자 메이슨의 보디가드들이 그렇게 요나에게 집착을 한 이유는 그녀가 훗날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요나의 경우엔 문밖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초능력에 가까운 능력을 보여준다. 물론 봉준호 감독이 <괴물>에서 인연을 맺어온 고아성을 위해 그런 설정을 그냥 넣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면?

 

남궁민수는 그 어떤 순간에도 요나가 살인을 하려고 하면, 자신이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 절대 딸의 손에는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여기에 <설국열차>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고 본다.

 

앞서 말했지만 열차의 절대자 윌 포드와 꼬리칸의 지도자 커티스는 결국 같은 속성의 인물이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활을 할 뿐이다. 만약 커티스와 윌 포드의 입장이 달랐다면? 그들은 둘 다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들은 손에 피를 묻힌 죄인들이다! 따라서 그런 그들이 새로운 인류를 이끌 수는 없다! 그래서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거의 대다수의 승객들이 사고로 몰살되고, 요나와 단 한명의 남자아이가 살아남은 것처럼 묘사된다. , 그들은 아담과 이브처럼 최초의 인류가 되어 원죄없는 새로운 순백의 세상을 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다시 돌아가서 왜 그토록 남궁민수가 열차문을 폭발시키려 했는지 짚어보자! 앞서 말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선 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적이다. ? 그건 인간이 만들어낸 욕망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선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효율성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린 자본주의 세상에서 태어나서 여태까지 자본주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의 세상외엔 다른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모두 <설국열차>에 갇혀있는 불쌍한 인물들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생각의 자유가 스스로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현재의 자본주의를 뒤엎고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후쿠시마 원전사태와 지구온난화는 현재 인류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건 욕망에 충실한 인간들이 지구를 마구 헤집고 자원을 마구 써대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선? 오늘날 인류는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포기해야만 한다!

 

원전을 없애기 위해선? 우리가 전기가 거의 필요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기가 거의 없는 삶을, 석유가 필요 없는 삶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조건>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는 여섯 멤버조차 불편하고 난감해하는 그런 삶을 평생 산다는 것은 상상조차 안될 것이다.

 

! 오랜 시간 고생하셨다! 이제 결론을 내보자! 왜 관객들은 <설국열차>를 보고 찝찝해할까? 간단하다. 영화를 통해서 오늘날의 인류를 되돌아보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의 똑같은 속성과 우리 인류가 지구에 어떤 죄를 짓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서 인류의 원죄와 속죄 그리고 구원 같은 메시지들을 던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우린 모두 누군가를 괴롭힌 적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안락한 생활. 전기만 켜면 집안이 밝혀지고, 세탁기가 돌아가고, 석유를 마음껏 쓰면서 자동차로 직장을 가는 등의 모든 생활 자체가 지구를 망가뜨리는 행위 그 자체다. 우리의 후손과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가야할 터전을 말이다. 그걸 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더불어 자본주의의 맨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인류가 구원받기 위해선 거의 대다수가 인류가 사라지는 결말부에 이르렀을 때 불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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