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박복녀는 왜 약과를 먹었는가? ‘수상한 가정부’

朱雀 2013. 10. 2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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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철네 식구들은 박복녀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서서 아버지의 불륜으로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한 자신들의 가정을 구해준 고마움에서다.

 

어떻게든 박복녀에게 웃음을 되돌려주고 싶어하는 호의에서 그들은 박복녀의 과거에 대해 무리하게 알려고 한다. 그래서 은두결은 뭐든 나오는 메리포핀스의 가방같은 그녀의 가방을 열려고 하고, 심지어 네 남매는 대결을 요청해서 과거를 묻는다.

 

그러나 박복녀가 누군가? 원더우먼인 그녀는 막내 혜결과의 가위바위보, 은세결과의 퍼즐맞추기, 은두결과의 팔씨름, 심지어 한결과의 노래방대결까지 압승으로 새삼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보여준다.

 

그러나 은상철네 아이들은 복녀가 과거를 자꾸 물으면 관두겠다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알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은 박복녀가 자주 가는 공원에 가서 패밀리 세트를 시키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음식들을 먹자고 권해본다. 물론 번번이 실패하지만. 왜 이런 과정을 <수상한 가정부>에선 그린 걸까?

 

9화 마지막엔 네 아이들의 노력이 성공해서 결국 박복녀가 약과를 먹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모두 말해겠다고 밝히면서 끝났다. 어찌보면 그녀는 약과를 좋아했으니 미리 알았다면 약과를 권하는 것으로 쉽게 목적달성(?)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약과를 먼저 권했다면 박복녀는 먹었을까? 애시당초 박복녀가 은상철네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식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복녀가 마치 로봇처럼 딱딱한 말투를 쓰고, 일외엔 절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서다.

 

아무리 은상철네 식구들이 음식을 권하고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해도 마다한다. ? 자신이 웃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다. 웃는 게 왜 두려운가? 살아 숨쉬는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수상한 가정부>에 나오는 이들은 모두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못 맺고 있거나, 가정에 뭔가 문제를 한두개씩 가지고 있다. 아나운서 남편을 둔 옆집 부인의 경우, 자신의 남편이 불륜중인 사실은 전혀 모르지만 언젠간 밝혀져서 큰 일이 벌어질 것이다.

 

정육점 신정만은 박복녀에게 한눈을 팔아서 항상 마누라에게 맞고 있다. <수상한 가정부>에선 다소 코믹하게 가정들을 그리고 있지만, 그 실상은 사실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병들어 있다. 황금만능주의와 무한이기주의가 판을 치면서 인간관계는 지극히 타산적이게 된지 오래다. ‘가족이란 최소한의 도피처마처 파괴된지 오래.

 

<수상한 가정부>는 그런 현대인의 현주소를 코믹하지만 최대한 가깝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드라마가 몹시 불편하다. 그러나 <수상한 가정부>의 미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말하는 것 같다.

 

오늘날 한 식탁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는 광경은 쉽게 보기 어려운 풍경이 되고 말았다. 가족조차 하루 한끼 식사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 시절에 박복녀가 은상철네 식탁에 앉아 약과를 먹는 장면은 새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의 불편을 견디지 못한 아내가 자살하고
, 그 여파로 풍비박산이 날 가정을 한 가정부가 와서 봉합시켜 놓는다. 그리고 네 아이들은 그런 복녀에게서 엄마의 향기를 느낀다.

 

극중 인물의 말처럼 가족은 핏줄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함께 살고 지내면서 정이 들면 그것이 핏줄보다 더 소중한 게 아닐까? 박복녀가 마지막에 약과를 먹은 것은 네 아이들의 정성에 감복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거부하고 식사초대를 마다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을성있게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모습에서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아닐까? 가족의 의미가 사라진지 오래인 21세기에 <수상한 가정부>는 약과를 먹는 박복녀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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