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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21세기 초강대국?! 71

오성홍기에 영향을 끼친 양계초

현대 중국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양계초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 역사를 보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중국 근대사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다. 바로 ‘무술변법’이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광서제가 적극 후원하고 강유위를 비롯하여 양계초를 비롯한 변법파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광서제는 말이 좋아 청나라의 황제였지,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28세의 성인이 된 황제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구열강들의 위력을 직접 확인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계속해서 맺고 있는 황제는 부국강병책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양계초의 스승인 강유위는 좋게 말해 대사상가지만, 부풀려진 경향이 크다. 이에 반해 제자인 양계초는 강유위보..

장개석과 모택동이 모두 존경하는 증국번

태평천국운동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의 최고위층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흔히 강희제를 꼽는다. 그렇다면 현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주석이라 할 만한 모택동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청나라 정계의 거목이 된 증국번이다. 근데 재밌는 점은 국민당을 이끌면서 그와 대결을 펼친 장개석 총통 역시 증국번을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가치관도 다르고 첨예하게 이해가 대립되는 두 사람이 근대격변기의 인물인 증국번을 존경하는 것일까? 태평천국운동은 한동안 중국 공산당에선 위대한 농민운동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고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증국번과 이홍장등은 반대급부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중국 근대화의 시조, 임칙서

한인관료 최초의 흠차대신 임칙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임칙서’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역사에 대해 조금 아는 이라면 ‘아편전쟁’을 떠올릴 것이고, 좀 더 아는 이라면 그가 편찬에 일조해서 훗날 한중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까지 알 것이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임칙서는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흠차대신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청나라에선 임칙서 이전까지, 한인 관료가 문관이 되어도 군사를 이끌 수 있는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멸만흥한’의 기치를 남몰래 항상 지니고 있는 한족을 청조정에서 못미더워한 까닭이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청조정이 한인관료를 우대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임칙서는 4세때부터 공..

굴욕과 치욕을 견뎌낸 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홍장

이홍장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 근대사를 보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한명 있다. 바로 이홍장이다. 스승 증국번과 함께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화려하게 청조정에 등장한 그는 말 그대로 중국근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일본과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북양군은 훗날 원세개에게 이어져, 그가 손문을 밀어내고 초대총통이 되는 정치적 밑거름이 된다. 젊은 손문은 북양대신인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강유위와 양계초는 그와 어느 정도 의견대립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호장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서태후를 비롯한 청조정의 뒷수습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열강들과 늘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거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조약을 체결한 것이기..

결국 황제에 올라 파멸을 자초하는 원세개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손문은 비록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지만, 견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 것이고, 참의원이 결정한 새로운 대총통은 남경에 와서 취임할 때 현 총통과 국무원들을 해임하는 것, 마지막은 ‘중화민국임시약법’은 참의원에서 제정한 것으로 대총통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손문의 요구조건을 듣고는 곧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세개의 세력권은 북경을 비롯한 북쪽지방이었다. 따라서 그가 손문의 홈그라운드인 남경으로 간다면, 그 위세는 초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참의원들이 정한 임시약법에 따른 것은 총통이 생각보다 그다지 권한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세개..

원세개는 어떻게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는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근대사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임시총통이 된 손문이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역사서에선 원세개는 단순히 ‘군벌’정도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군사력이 남다른 것만 가지고는 아무리 허약한 중화민국 초기라해도, 민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원세개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파멸을 자초했지만, 그럴 수 있을만큼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안의 사정은 어때했던 것일까? 자! 이제 이야기를 신해혁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09년 1월 6..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자!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배신으로 청조정의 1인자가 되는 원세개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1895년 원세개는 하남을 관장하는 순무에게서 전보를 받는다. 바로 광서제를 알현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로, 군을 새롭게 개혁해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광서제는 당시 유능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권력에 항상 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일삼던 원세개가 ‘유능한 신하’라는 일부의 주장 덕분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서구열강들의 신식군대의 위력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원세개는 군의 개혁을 소리 높여 주장했고, 광서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군기처에 장경으로 임명했다. 장경의 일이란 ‘고문’ 정도로 그저 2-3일에 한번 정도 군기처에 나가면 되는 한가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권력지향적인 원세개는 이런 직책에 ..

원세개,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원세개.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한번은 임오군란때 들어와서 사사건건 간섭을 한 것이요, 두 번째는 중화민국 건국시 총통이 되었다가 결국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결국 일본에겐 21개조 요구를 받고, 중국인들에겐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용납을 받지 못해,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는 ‘위안스카이’라는 중국식 발음 때문에 만주족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의 가문은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후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엔 증국번과 이홍장이 있었는데,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훗날 북양대신을 거쳐 흠차대신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홍장에 의해 창설된 북양군은 원세개의 의해 보다 현대화-제도화 되었으며,..

장학량은 왜 장개석 총통을 감금했는가?

청년 시절의 장학량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역사는 때때로 한 사람에 의해 큰 흐름이 바뀔 때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는 여러 인물들로 인해 그 흐름이 크게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장개석과 모택동의 명운을 크게 바꾼 사건을 들라면 아마도 1936년 12월 12일 벌어진 ‘서안사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산군 토벌을 격려차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섬서성에서 체포하여 감금한 사건으로 중국 전체를 들었다 논 일이었다. 이는 당시 장학량이 남경정부의 부사령관이며, 장개석의 부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하극상’이란 초유의 사태다. 게다가 당시 장개석이 국민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야기는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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