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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10

시진핑을 비판하다! ‘차이나는 도올’

지난 17일 방송된 ‘차이나는 도올’ 7화에선 시진핑을 비판했다. 처음엔 제자들이었다. 제자들은 비좁은 방에서 사는 것도 부족해서 방공호에서 사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말하면서 엄청난 중국의 빈부격차를 지적했다. 또한 모택동 이후 최대 지지율이 99.86%를 기록했지만,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인터넷에 남기면 삭제와 동시에 법적 처벌을 받는 현실을 지적했다. 시진핑의 궤적은 나라와 사상을 뛰어넘어서 분명히 인상깊은 대목들이 존재한다. 판공청 비서라는 앞날이 창창하게 보장된 길을 던지고, 지방에 내려가 인민들과 함께 하면서 ‘주석’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 그가 중국 최고의 권력자인 국자주석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엔. 2007년 제 17차 당대회를 앞두고 시진핑이 상해 제 1서기가 ..

TV를 말하다 2016.04.19

중국이 가야할 길은? ‘차이나는 도올’

어제 ‘차이나는 도올’을 보면서 새삼 많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우선 개인적으로 ‘중국’에 대해 얼마나 잘못 알고 있고, 모르고 있는 부분이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이 될때까지 무명에 가까웠다. 주석이 되고 나서야 그에 대해 알려졌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종쉰이 국가원로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그가 무려 19살이란 어린 나이에 섬서성을 소비에트화 시킨 것은(진영의 논리를 떠나서)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반동분자’로 몰려 무려 16년 동안 억울한 유배생활을 해야만 했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아무리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전까진..

TV를 말하다 2016.03.21

왜 도올은 jtbc를 선택했을까? ‘차이나는 도올’

어제 처음 시작한 ‘차이나는 도올’을 보았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 교수가 출연했던 ‘중용, 인간의 맛’을 비롯한 방송들을 보았기에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첫회를 보곤 솔직히 좀 실망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방송에 비해 지식의 밀집도가 상당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차이나는 도올’’은 시청자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시진핑이 권력지향적인가? 이상주의적인가?’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국’은 삶과 어떻게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중국과의 수출입 금액은 미국에 이어 2위로, 756억 달러 규모다. 717억 달러 규모인 일본과 비교해보면 중국이 얼마나 우리에게 큰 무역상대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또한 유커라 불..

TV를 말하다 2016.03.07

혼란한 현대중국에 해법을 제시했던 양계초

양계초 - 이미지출처 : 위키백과 광서 33년(1907) 10월 17일 요코하마에서 칩거하던 양계초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서 다시 활발한 강연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도중에 수 백명의 중국동맹회 회원들이 난입해서 폭행할 정도로 어려움과 고통이 뒤따르기도 했다. 허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광서 34년(1908)년 상해에 정문사를 만들고 그는 스승 강유위와 함께 국회의 개설을 위한 조속한 청원운동에 들어갔고, 이는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서태후는 정문사를 폐쇄시키나, 11월 광서제와 서태후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부이가 황제에 오르고) 재풍이 섭정왕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재풍은 섭정이 되자마자 원세개를 잘라냈고, 강유위는 크게 기뻐하며 원세개의 죄상을 까..

오성홍기에 영향을 끼친 양계초

현대 중국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양계초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 역사를 보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중국 근대사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다. 바로 ‘무술변법’이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광서제가 적극 후원하고 강유위를 비롯하여 양계초를 비롯한 변법파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광서제는 말이 좋아 청나라의 황제였지,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28세의 성인이 된 황제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구열강들의 위력을 직접 확인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계속해서 맺고 있는 황제는 부국강병책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양계초의 스승인 강유위는 좋게 말해 대사상가지만, 부풀려진 경향이 크다. 이에 반해 제자인 양계초는 강유위보..

장개석과 모택동이 모두 존경하는 증국번

태평천국운동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의 최고위층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흔히 강희제를 꼽는다. 그렇다면 현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주석이라 할 만한 모택동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청나라 정계의 거목이 된 증국번이다. 근데 재밌는 점은 국민당을 이끌면서 그와 대결을 펼친 장개석 총통 역시 증국번을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가치관도 다르고 첨예하게 이해가 대립되는 두 사람이 근대격변기의 인물인 증국번을 존경하는 것일까? 태평천국운동은 한동안 중국 공산당에선 위대한 농민운동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고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증국번과 이홍장등은 반대급부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장학량은 왜 장개석 총통을 감금했는가?

청년 시절의 장학량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역사는 때때로 한 사람에 의해 큰 흐름이 바뀔 때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는 여러 인물들로 인해 그 흐름이 크게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장개석과 모택동의 명운을 크게 바꾼 사건을 들라면 아마도 1936년 12월 12일 벌어진 ‘서안사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산군 토벌을 격려차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섬서성에서 체포하여 감금한 사건으로 중국 전체를 들었다 논 일이었다. 이는 당시 장학량이 남경정부의 부사령관이며, 장개석의 부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하극상’이란 초유의 사태다. 게다가 당시 장개석이 국민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야기는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를 당..

마오쩌둥이 한국전 참전을 결심한 이유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유치원생이 대학생에게 싸움을 건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주변 사람들은 유치원생을 웃으면서 말릴 것이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중공군이 6.25 전쟁에 참여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군과 공군이 없고 변변한 무기도 없는 중국이 (그들이) 따르는 소련보다 더 강대한 나라인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자살행위’ 이상으론 보이질 않았다. 나이를 먹고 책을 찾아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겪으면서 잿더미가 된 중국 공산당이 국가예산의 50% 이상과 백만명이 넘는 군사력은 동원한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만약 그 당시 장제스가 대만에서 나와 본토를 공격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변..

마오쩌둥과 진시황제는 닮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 -사진 출처: 위키백과 진시황제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불로장생의 약을 애타게 찾은 황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 호화로운 궁전인 아방궁을 짓게 만든 장본인? 1974년 3월 발견된 이래 계속해서 발굴중인 진시황릉의 주인? 분서갱유? 만리장성? 아마도 진시황제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 정도에서 멈출 것이다. 진시황제는 이름 그대로 ‘최초의 황제’를 뜻한다. 진시황제는 춘추전국시대(BC 770-221)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진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여겨 전설로 내려오는 군주인 삼황오제에서 따와 ‘황제’라고 칭했다. 사실 진시황제의 업적은 대단하긴 하다. 진시황제 이전까지 중국의 역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은-주의 세 왕조가 등장하긴 하..

당신이 생각하는 중국문화란 없다!

유학의 시조인 공자의 초상 출처: 위키백과 풍경 1: 현재 중국 전역에서는 설날 아침에 차례나 제사를 일체 지내지 않는다. 1949년 모택동이 중국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제사 등을 미신으로 규정하며 없어져야 할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선 제사 지내는 것이 불법이다. 출처 : 교회신문 풍경 2 : 2004년 중국 산동성 곡부에선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 의식이 치러졌다. 중국공산당이 직접 주관하고, CCTV를 통해 국내외에 무려 4시간에 걸쳐 방송되었다. 참고 : 해럴드 경제 오늘은 간단한 문제로 시작하겠다. ‘풍경 1’을 보면 알겠지만, 중국에선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물론, 제사지내는 방법 자체가 사라졌다. 그런데 ‘풍경 2’를 보면 중국 공산당이 직접 주도하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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