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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 3

임진왜란은 왜 불행한 역사의 사건인가? ‘차이나는 도올’

‘차이나는 도올’ 11화에선 ‘명량’의 김한민 감독을 초대해서 ‘임진왜란의 뒷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먼저 시작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4시 부산을 통해서 약 500여척에 5만여명의 왜군이 쳐들어왔다. 만약 이때 부산을 지키던 장수가 무려 20시간이 넘게 현해탄을 건너온 왜군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기고, 김용옥 교수의 표현대로 ‘불화살만 제대로 날렸더라도’ 어쩌면 하룻만에 임진왜란은 끝날 수 있었다. 상륙을 했더라도 호남지방을 이순신 장군이 철통같이 지켜서 보급로를 완전히 끊었기에, 한강에서 제대로 막아냈다면? 쉽게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역사에선?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가기 바빴다. 선조는 조선사에서 최초로 적자가 아닌 서자가 ..

TV를 말하다 2016.05.16

원세개는 어떻게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는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근대사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임시총통이 된 손문이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역사서에선 원세개는 단순히 ‘군벌’정도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군사력이 남다른 것만 가지고는 아무리 허약한 중화민국 초기라해도, 민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원세개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파멸을 자초했지만, 그럴 수 있을만큼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안의 사정은 어때했던 것일까? 자! 이제 이야기를 신해혁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09년 1월 6..

통일 중국을 놓고 장개석과 끝까지 겨룬 장작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장개석은 분열되어있던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장작림과 마지막까지 싸워야했다. 장작림은 동북왕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의 야심은 ‘만주의 패자’가 아니었다. 바로 중국을 통일한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적이었던 오패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승승장구하자 북진해오자, 이를 기회로 삼아 1925년 9월 7일 북경에 입국하고, 11월 30일 안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6월 18일 북경에서 대원수로 취임했다. 장작림이 급하게 대원수에 취임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군의 무력이 너무나 강했다. 장작림과 연합한 군벌 손전방과 장종창이 형편없이 밀려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장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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