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공한증의 시작은 고구려?!

朱雀 2011. 1. 2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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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수렵도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일본에서 ‘차이니즈 드래건’이란 신문사를 운영하는 콩젠은 공자의 75대손으로 그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는 <한권으로 읽는 중국인의 실체>에서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한다고 자부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불쾌하고 제멋대로 구석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각을 ‘중국인+지식인’임을 감안하고 본다면 꽤 흥미롭다.

 

그는 일본에 대해 시종일관 불쾌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등장하는데, 일본과 중국의 문화가 다른 것에도 기인하고, 무려 30만명이 학살당한 ‘난징대학살’같은 과거사가 전제로 깔리기도 한다. 오늘날 반성 없는 일본에 대해 저자는 화를 내고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한다. 그러면서 비슷한 과거를 지닌 한국에 대해선 '귀인‘이니 뭐니 하면서 좋은 감정을 드러낸다. 여기엔 ’같이 당했으니 뭉쳐서 일본에 대항하자‘라는 구호가 공공연하게 내포되어 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 중에 하나는 ‘수당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정복되지 않았던 고구려, 한족이 제대로 정복한 적은 한 번도 없고, 원나라와 청나라의 이민족 왕조만이 정복한 역사’를 들면서 ‘공한증(恐韩症)’의 시작을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지적하는 부분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콩젠의 의견일 뿐이다.

 

그 구절을 읽으면서 ‘중국은 왜 그렇게 우리를 지독하게 침공했을까?’란 의문이 떠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용한 교수가 지은 <전쟁과 역사>라는 책에 그 이유가 확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중국은 한족 왕조와 이민족 왕조가 번갈아 지배했다. 한족왕조가 쇠퇴하면 이민족이 치고 들어와 영토를 점거하고 그들이 성장하여 중원의 패권을 차지했다...(중략) 수와 당은 거의 왕조의 안정과 생존의 차원에서 고구려를 해체하려 한 것이다.(중략) 그 후의 역사를 보아도 이런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몽골족의 원, 거란족이 세운 요, 여진족이 세운 금, 만자족이 세운 청나라 모두 이때의 고구려보다도 열악한 부족단위에서 시작하여 중원을 제패했다.

 

<전쟁과 역사> 삼국편



 

이제부터 이 결론에 좀 더 살을 붙여볼까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수나라는 3차에 걸쳐 원정을 나섰다. 무려 200만의 인원이 동원한 대전쟁이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원정의 실패와 대운하 건설 등이 겹쳐서 결국 불과 개국한지 39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당태종은 ‘정관의 치’를 이룩했다고 (중국에선) 떠받들어지는 황제지만, 그 역시 100만명이 넘는 인원을 동원하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당 고종과 신라와 협공하여 668년 멸망할 때까지 무려 8번의 침입을 막아냈다.

 

위에서 지적했지만 당나라는 ‘천자의 나라’임을 천명했다. 따라서 자기와 똑같이 황제와 제후국이 존재하는 고구려는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또한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정복당한 전력이 있는 그들로서는 고구려를 도저히 놔둘 수 없었다.

 

당에 이어 성립된 송나라는 태생적으로 허약한 나라였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만약 고려만 아니었다면, 송나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고려가 거란-여진과 전쟁을 벌임으로써 송나라는 땡큐하게도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성립할 때까지 무려 약 320년을 유지하게 된다.


몽고족은 1231년 압록강을 넘어 진격하지만, 고려에게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무려 30년이 걸린다.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고족은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성공하지 못한 난공불락인 러시아를 정복했다. 현대의 소련과 미국도 못한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했고, 신비의 암살자집단으로 알려진 ‘하시신’까지 끝장냈다.

 

따라서 그런 몽고군에 맞서 30년을 버틴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다! 비록 당시의 고려군은 전면전에선 승리한 적이 거의 없으나, 수성전에서 몽고군이 감탄할 만큼 잘 막아냈고, 철저한 ‘게릴라 전법’으로 몽고군을 괴롭혔다. 따라서 원나라가 고려에게 ‘부마국’을 부여한 것은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1636년 12월 침입하며 발발한 전쟁은 불과 두달 만에 ‘삼전도의 굴욕’을 끝났는데, 어찌보면 불필요한 희생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후방에 있는 조선을 몹시 두려워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위력을 익히 들은 터라, 수군이 없는 그들은 몹시 두려워했다.

 

명나라는 명나라대로 청나라에게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광해군 때처럼 적당히 외교를 잘하면 오히려 이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들이 ‘척화론’을 주장해서 화를 자초했다.

 

간략하게 살펴보았지만, 우리나라는 위치상이나 역사상으로 중국의 판도에 영향을 실제로 끼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나 실제상으로 고구려-고려-조선 등은 중원을 통일하려는 나라들에게 무척이나 신경 쓰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통일왕조와 ‘통일’을 꿈꿨던 이들에게 우리 선조들은 여러모로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한증(恐韩症)’의 기원을 고구려부터 찾는 콩젠의 시도는 나름대로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참고: <전쟁과 역사> <한권으로 읽는 중국인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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