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왜 중국은 100년이나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朱雀 2011. 1. 21.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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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 -사진출처: 위키백과


중국 관련도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은 왜 아편에서 벗어나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을까?’였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에게 굴욕과 더불어 ‘아편’이 중국에 공공연하게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에서 흑자를 보기 위해 아편을 뻔뻔하게 유통시킨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도 놀랍지만, 그 이후 아편이 중국에 일으킨 문제를 보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까진 맹위를 떨쳤다. 1880년대는 4천만명이 흡연자고 전체 인구의 5%인 2천만명이 ‘중독자’가 될 지경이었으니 그 폐해는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편 때문에 자식과 아내를 팔아버린 이야기나,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등지에서 보는 아편굴은 실제 1900년대 초반에는 상해에만 2천개가 넘게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이렇게 아편천국이 된 것일까? 이홍장이 1839년 파견될 당시를 보면 청황실과 대표들은 아편의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옹정제 당시 1729년 세계최초의 금연령이 내려진바 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세태는 고위층이나 부유층에서 ‘멋’으로 아편을 피웠다는 데 있다. 아편은 값도 비싸고, 태우는 방법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의 풍류를 만들어 냈다. 또한 일반 백성은 그런 상류층의 모습을 부러워해서 따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단다.

 

아편의 특성상 중독되어도 몇 년 내로는 증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 탓이 컸다. 여기에 더해 당시 잘못된 의료상식도 컸다. 당시 중국에선 아편을 병을 낫게 해주는 약으로 오해해 남용했다. 아편을 피우면 초창기에는 아픈 것이 사라지고 일시적으로 힘이 강해져서 이런 오해를 한 것이었다. -중독자의 70%정도가 ‘약’으로 오인하고 사용했을 정도-

 

청왕조는 부단한 노력 끝에 1906년 9월 아편 금지령을 내리고 1917년까지 아편을 근절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1907년 영국과 조약을 맺어 매년 10% 아편을 줄이고, 1917년까지 아편을 금지하기로 한다. 이런 조약이 가능했던 것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 역시 당시 세계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었다. 실제 어느 정도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이런 정책은 그러나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면서 좌초하게 된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고 나서는 각 성들의 군벌들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비를 위해 서로 양귀비를 재배하고 아편을 제조함으로써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1924년 쑨원은 ‘거독유훈’을 발표하며 아편의 해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관동정부에선 군비마련을 위해 아편생산과 판매를 묵인하고 만다.

 

그의 유지를 이은 장제스의 남경정부 역시 군비 마련을 위해 두루뭉실하게 넘어갔고, 다른 군벌들 역시 그러했다. 여기에 더해 다른 서구열강과 달리 일본은 미쓰이상사와 미쓰비시상사들이 이란과 인도 등에서 아편을 수입해서 팔고, 이것도 부족해서 조선에서 아편을 생산해서 만주를 비롯한 중국에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는 파렴치한 짓을 벌였다. -오늘날 눈부신 일본의 경제성장엔 이런 추악한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

 

정리해보면 아편은 일단 상류층에서 멋으로 피우고, 이를 동경한 평민들에 의해 중국에 퍼져나갔다. 아편전쟁은 이를 촉발시켜 대대적인 규모로 키웠다. 청왕조는 아편금지령을 내렸지만, 1911년 발발한 신해혁명과 뒤이은 군벌들의 난립으로 이를 이어갈 수 없었다. 여기에 척박한 토지에 사는 농민들은 수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재배했고,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뻔뻔한 범죄행위를 지속해나갔다.

 

결론적으로 중국인들은 1842년부터 1949년까지 아편의 굴레에 머물러야 했다. 아편에 취해 처자식을 팔아먹고 길가에 나앉는 이들의 사연은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국부는 나라밖으로 유출되었고, 서구열강이 아편을 수출하지 않아도, 군벌을 비롯한 탐욕스런 관리와 빈곤한 농민들에 의해 기름진 농지가 양귀비 재배장이 바뀌는 모순을 겪어야 했다. 아편은 중국인의 심신을 망가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 폐해와 과정에서 치명타를 연속적으로 가했다. 따라서 1842년 난징조약이후는 그 자체만으로 중국에겐 ‘굴욕의 100년’이라 칭할 만하다.

 
 

 

참고: <아편과 20세기 중국> <현대중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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