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21세기에 왜 우린 클래식을 들어야 하는가?, ‘2012 교향악 축제’

朱雀 2012. 3.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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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교향악 축제, 사진출처: 한화데이즈

 

오는 41일 부터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한화그룹이 후원하는 ‘2012 교향악축제가 펼쳐집니다. 국내의 21개의 교향악단이 서로 다른 레퍼토리를 가지고 연주회를 가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며, 다양한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관객으로서 매우 즐겁고 유익하며 또한 행복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에 길이 빛날 여러 거장들의 다양한 곡을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클래식이란 이름만 들어도 하품이 쏟아져 나오고,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진 당신을 위해 클래식의 세 거장 모차르트-베토멘-슈베르트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먼저 모차르트입니다. 그는 우리에겐 음악의 신동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 살때 누나가 건반을 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이미 연주하는 법을 터득했고, 네 살 때 이미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고, 다섯 살 때는 이미 작곡을 했으며, 일곱 살때는 아버지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도 묘사되지만 한번 듣는 것만으로 그 악보를 모조리 외울 정도로 엄청난 천재였습니다.

 

왜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인가?

 

! 근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은 천재라 이름 붙여 마땅한 이들이 분명 많습니다. 그들 역시 어린 나이에 작곡을 하거나 연주를 한 경우가 허다하구요. 그렇다면 왜 유독 모차르트만이 신동으로 기억되는 걸까요? 왜 모차르트 이전에는 클래식 역사에 신동이 등장하지 않는 걸까요?

 

살짝 당황스러우시죠? 여기서 시대적-역사적 배경이 등장합니다. 모차르트는 1756년 태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중세에서 슬슬 벗어나서 유럽이 근대로 가는 시점이었습니다. 1760년대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3세 등의 계몽군주들이 대거 등장하는 시기기도 하구요.

 

이들 계몽군주들은 선진적인 철학과 문학 그리고 예술가등을 초빙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마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요. 일례로 삼고초려 끝에 괴테를 재상으로 모셔간 바이마르 공국의 카를 아우구스트가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신동은 중세지역에선 마귀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받던 시기였습니다. 중세시대엔 뛰어난 재능이나 비상한 재주를 지닌 신동을 정상에서 벗어났다고 봤기 때문에 몹시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하여 그런 아이들은 내쳐지거나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계몽군주가 이전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이전 세대와 달리 문화적-경제적으로 성장한 시민계급은 자신의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고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겐 상징이 필요했습니다.

 

여덟 살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한 모차르트는 이런 유럽에서 가장 좋은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중세시대 어린이들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애정을 듬뿍 받고, 일에서 벗어나 학문을 비롯해서 각종 교육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초의 어린이였던 것입니다.

 

당시엔 어린이를 위해 그림형제의 동화가 나오고, 각종 어린이용 대회가 경쟁적으로 열리면서 서로 대결을 통해 재주를 겨루는 것이 일상적인 풍경이었습니다. 특히 모차르트가 연주여행을 다니면, 시민들이 몰려와서 성황을 이루었는데, 이는 그가 당시 문화적 아이콘이자 중산층의 욕망의 대변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계몽군주들은 이런 어린 신동을 발굴 및 후원함으로써 자신의 체면과 존재가치를 더욱 빛낼 수 있었지요.

 



-베토벤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연주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차르트와 곧잘 비교를 당하며 아버지에게 무시를 당했지요. 그의 그런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은 게리 올드만이 주연한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잘 묘사되고 있답니다-

 

신동 모차르트는 그렇게 우리에게 신동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된 것입니다. 물론 모차르트는 그저 운이 좋아서 클래식의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 유럽에선 귀족들을 즐겁기 위해 연주되던 클래식이, 귀족에게서 벗어나서 일반 시민을 위해 연주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계몽군주들은 시민의 요구에 힘입어 대중을 위한 커다란 음악회장을 짓기에 이릅니다.

 

이는 시민들의 문화적 열망과 자신이 계몽군주로서 명성을 높이기 위한 욕구가 맞아떨어진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전까지 조용하고 짧은 레퍼토리를 가진 음악은 이제 길어지고 동시에 혁신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즉 이전까진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의 하인취급이나 받던 음악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주회를 열어 시민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명성을 떨치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모차르트는 그런 행운을 누린 최초의 인물 중에 한명입니다.

 

사진출처: 한화데이즈
 

텔레비전도 영화도 없던 시절 시민들은 오페라에 열광했고, 음악가들은 서로 다른 시도를 통해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오페라는 연주자도 늘고 기법도 화려하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귀족에 비해 음악적 감수성이 부족한 시민들은 늘 새로움만 추구했고, 이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당대 음악인들을 그런 시민들에게 다가고자 피말리는 경쟁을 계속 해나갔습니다.

 

모차르트가 지은 <마술피리><돈 조반니>는 시민적 감성과 내용을 다른 작품으로, 이전까진 없었던 작품입니다. <돈 조반니>166년 몰리에르가 쓴 <돈 주앙>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오늘날 우리는 그저 천하의 바람둥이로 생각하기 쉽지만, 방탕한 돈 조반니를 통해 당시 타락하고 삐뚤어진 귀족사회를 풍자한 작품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입한 비밀결사단체 프리메이슨을 위해 만든 <마술피리>도 마찬가집니다. 프리메이슨의 상징 등을 많이 따온 <마술피리>의 내용은 밤의 여왕과 빛의 세계의 대결을 다루고 있습니다. 작품은 밤의 여왕이 결국 패배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미 비이성의 중세에서 시민이 해방되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때요? 꽤 심오하죠? 중세와 근대 사이에서 모든 문화적 혜택을 듬뿍 받은 모차르트. 그는 분명히 클래식 역사에 신동으로서 이름을 올리기에 손색이 없지 않은가요?

 

치명적인 고통에도 음악을 놓지 않은 거장 베토벤

 

 

1802년 베토벤은 죽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서른 두 살의 베토벤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유 없이 주위 사람들에게 심하게 화를 내고, 두통과 귀울음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더더욱 그를 답답하게 한 것은 이런 그의 행동을 주위 사람들이 오해해서 그의 음악마저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베토벤의 죽음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유예되면서 교향곡 3번부터 9번까지를 비롯해 피아노 소나타와 <장엄미사>등의 명곡을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당시 심각한 우울증과 소화기 장애등의 병을 앓았는데, 당시 의사들은 그의 병명이나 처방을 전혀 내려주지 못했습니다.

 

병의 원인은 지난 2000년이 되어서야 겨우 밝혀집니다. 바로 납중독이었습니다. 그의 장례식 때 참여한 페르디난드 힐러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관했는데, 이것이 1994년 소더비 경매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분석이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각종 질환을 겪었는데 이 과정이 흡사 매독과 비슷해서 그동안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매독환자로 오해를 받아왔는데, 170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면서 명예를 회복한 셈이지요.

 

납중독은 성격 장애는 물론 베토벤을 괴롭힌 청각장애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신체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데, 베토벤은 평생 모르핀 처방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무너져가는 육체를 다잡아갔다고 합니다.

 

주위의 오해와 고통 속에서 홀로 안으로 안으로 예술혼을 불태우며 싸운 그의 집념이 느껴지는 대목이랄까요? 베토벤이 살던 시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프란시스 베이컨과 아이작 뉴턴이 활동하던 때였습니다.

 

베토벤은 운 좋게도 하이든과 모차르트틀 모두 만나게 되고, 그들의 음악적 자양분을 모조리 흡수하게 됩니다. 쇤베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가 만든 소나타 양식은 너무나 완벽해서 후배 음악가들이 그 주위에서 떠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마치 태양 주위를 행성들이 돌듯 이 그의 영향력은 강력했습니다-

 

하여 베토벤은 마치 예수탄생을 기점으로 역사를 구분하듯이, 음악사에서 빛나는 거성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고전주의를 완성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를 열어제낀 그야말로 놀랍고 위대한 음악가라고 밖엔 형용할 말이 없습니다.

 사진출처: 한화데이즈

 

베토벤은 지휘를 작곡과 동등한 위치에 올렸고, 자신의 작품은 내가 지휘한다라는 신념으로 귀머거리일 때조차 지휘석에 선 고집불통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인생은 보통 3기로 나뉩니다.

 

1기는 모방기로 1802년까집니다. 그는 주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았으며, 피아노 소나타 10곡과 1~2번 교향곡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2기는 1816년으로 교향곡 3번부터 8번까지, <에그몬트> 서곡, 오페라 <피델리오> 등이 그 대표작입니다.

 

우리가 듣는 표준적인 고전주의 음악이 이때 완성되었습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완성한 음악적 표현을 파괴하고, 하나의 동기에서 다른 동기로 달려가는 형식을 취합니다. 동시에 급격한 형식의 변환과 연주자들의 공격적인 기교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적 혁명을 추구합니다.

 

그의 음악 선배인 하이든은 평생 하인복장으로 귀족에게 굽신거렸고, 모차르트 역시 조금 낫긴 하지만 평생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반면 베토벤은 평생 동안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거나 마감독촉을 시달린 적이 없었습니다. , 19세기 달라진 음악가의 위상이 베토벤의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 기반을 제공한 셈이죠.

 

베토벤은 클라리넷을 정규 악기로 편성하고 호른-피콜로-바순-트럼본 등을 추가시키면서 건반악기의 역할을 축소시켰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편성을 통해 새로운 관현악을 들려주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음계를 재해석 함으로써 자신의 선배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뛰어넘는 장대함과 웅장함을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베토벤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그가 당대의 평판과 세간의 비평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예술혼을 불태우며 예술 그 자체에 몰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낭만주의로 망명을 떠난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우리에게 겨우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요절한 음악가 정도로 많이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죽은 지 딱 1년만인 1828년 죽었습니다. 그의 시기는 정확하게 베토벤의 황금기와 일치하기에 당시에 그의 평가는 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슈베르트가 살던 시기는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빈의회에서 열강들이 모든 것을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린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당시 유럽에선 정치적 탄압이 너무나 거셌기 때문에, 시민들은 살롱에서 정치적 언쟁을 하는 대신, 집에서 가족과 담소나 나누고 우아하게 음악을 즐기는 삶으로 돌아간 시기였습니다.

 

혹시 슈베르트의 특징을 기억하십니까?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매력적인 구렛나룻, 동그란 안경테 등등. 이건 당시 신사들의 전형적인 였습니다. 슈베르트가 죽던 당시, 그는 겨우 정장 세 벌과 조끼 아홉 벌, 모자 하나, 신발 다섯 켤레 등을 남겼습니다. 이는 당시 시민들의 일반적인 경제력을 따져봐도 한참 못 미치는 부분이죠. 음악사에 길이 남을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이런 슈베르트의 외양은 당시 유행이었고, 이런 양식은 국가의 억압으로 인해 자유로운 정치토론이 불가능해진 시절, 사치스러운 양식으로 돌아간 당시의 패션이었습니다. 슈베르트의 패션을 가지고도 당대의 한면을 읽을 수 있는 것이죠-

 

슈베르트는 엄격한 교사였던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고, 32세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병마와 가난과 싸우면서 오로지 작곡에만 매달렸습니다. 일례로 1815년에만 무려 144곡이나 되는 가곡을 만들 정도로요.

 

그렇다면 왜 슈베르트는 그렇게 작곡에만 몰두했을까요? 슈베르트는 그 짧은 생애동안 현실에 참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쩌면 그는 빈회의 이후 경찰국가로 돌아간 유럽국가들이 시민들이 토론만 해도 잡아가자, 시대에 환멸을 느끼고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갔는지 모릅니다.

 

현실을 바꾸기엔 너무나 자신의 연약함을 느끼고, 상상력이 빈곤한 속물적인 관객에겐 너무나 소중한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기 싫어서 오로지 가족이나 친지 그리고 소중한 몇 명 이들만 불러놓고 들려줄 정도로 말이죠.

 

물론 베토벤 시기에도 예술가의 자율성은 중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슈베르트 시기만큼 음악가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음악에 매달린 시기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전처럼 귀족이나 시민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팔고 돈을 벌지 못했기에 분명 슈베르트 같은 이들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 대신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클래식을 새로운 반열에 올렸습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곡 <방랑자 환상곡>, 교향악 8번 등을 들어보십시요! 거기선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참한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충동과 광기에 휩싸입니다. 그런 내적 혼란은 당시 그가 살던 19세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시절, 내적으로 파고들어가서 정신적 망명을 추구한 슈베르트는 비록 힘들고 어려운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음악들은 우리에게 당시 예술가와 시민들의 고통과 피폐한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전해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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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와 함께하는 2012 교향악 축제

 

올해로 스물 네 번째 무대를 맞는 교향악 축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 외에도, 비극의 서정과 슬픔의 미학으로 베토벤 식 음악을 고집한 브람스, 독일 민족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한 시대의 거장 바그너,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를 혼합한 차이콥스키, 근대의 불만과 현대의 불안을 그린 말러, 러시아혁명기의 예술가의 비참한 삶을 그린 쇼스타코비치 등의 대표곡들이 연주될 예정입니다.

 

서울과 지방간의 음악의 벽을 허물고 과감한 시도와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사할 ‘2012 교향악 축제는 클래식에 관심이 많다면 더욱 좋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며 최선을 다해 음악적 완성을 추구한 거장들의 시대정신을 느낄 수 있는 뜻 깊은 시간이 될 거라 여겨집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한화그룹이 이런 교향악 축제에 후원하는 것 역시 매우 의미 있고 뜻 깊다고 생각됩니다.

 



공연스케줄(<-클릭)

영화나 TV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지만, 때론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클래식을 들으며, 치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고뇌를 느껴보는 것도, 어느 때보다 풍요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이 넘쳐나는 21세기에 때론 휴식이 때론 힌트를 줄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한화그룹이 후원하는 ‘2012 교향악 축제에 기쁜 마음으로 공연을 보기 위해 갈렵니다. 오는 41일부터 24일까지 강남 심포니 오케라스타를 비롯해서 21개의 교향악단과 협연자들이 들려줄 클래식 거장들의 음악이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들려질지 벌써부터 기대되고 설레일 지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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