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영화가 개봉했다는 소식에 별다른 관심이 생기질 않았다. 아마도 여친과 주말에 영화를 볼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절대 절대 극장에서 보지 않았을 작품이 바로 <건축학개론>이다.
글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한가인에게 사과하고 싶다. 그녀가 연우를 해서 <해품달>의 몰입도와 완성도에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그다지 변화는 없다.
-영화에 대한 내용이 살짝 언급됩니다. 아직 영화를 보시지 못한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녀는 최소한 ‘연기를 못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단지 <해품달>과 맞지 않았던 것 뿐인 것 같다. 발연기를 운운하기엔 이 작품에서 그녀의 연기눈 분명히 훌륭했다! <건축학개론>에서 한가인은 첫사랑 승민(엄태웅>을 보기 위해 사무실을 찾는다.
거기엔 유들유들하고 적당히 세상과 타협한 건축설계사가 있었다. 제주도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한가인에게 엄태웅이 틱틱거리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도저히 그녀의 고운 입에선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 말들을 내뱉고는 가버린다.
그러나 그녀는 정작 차를 타는 데 필요한 열쇠와 핸드폰을 놓고 갔다. 그렇다! 그녀는 더 이상 엄태웅의 추억속에만 존재하는 흰색의 대상이 아니다. 추억속에서 현실로 나온 그녀는 적당히 떼를 타고 적당히 머리를 쓸줄 아는 여성이다.
<건축한 개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은 단연 여배우들이다. 수지를 보고 ‘이렇게 연기 잘했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건 한가인의 연기를 보면 더하다. 제목에 ‘한가인의 재발견’을 운운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한가인이 연기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한가인은 자신의 미모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가,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을 질질 끌다가 한몫 챙긴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누가 그녀를 욕하겠는가? 요즘처럼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어쩌면 그건 당연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
한가인은 대학 1학년때 승민이 자신에게 설계해준 집을 짓도록 하기 위해 엄청난 유도를 한다. ‘설계가 마음에 안든다’ ‘잘 모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등등.
엄태웅과 단둘의 시간을 갖기 위해 집을 핑계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가, 사무실에서 봤던 여성이 동행하고 나왔는데 알고보니 그녀가 약혼녀라는 사실을 알고 보여주는 그녀의 내면연기는 몹시나 훌륭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고른 넥타이를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는 그녀의 표정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있었고, 10년도 넘어서 만난 첫사랑에게 결혼상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실망함이 묻어 있는 얼굴도 인상적이었다. 입으로는 연신 ‘축하한다’고 말하지만, 그녀의 눈과 표정은 분명 충격이 전해 있었기 때문이다.
<건축학개론>의 한가인의 외모는 분명히 화려하다. 그녀는 ‘청담동 며느리룩’이라도 불러도 좋을 만큼 화려한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그러나 모진 세상의 풍파를 겪고, 제주도에서 매운탕에 소주한잔을 걸치다가, ‘그냥 나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하네’라고 말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무엇보다 그 다음에 이어서 ‘아! X발 X같아!’라고 찰지게 욕하는 장면에서 놀라움은 몇배로 늘어나 버린다. 초반에 그녀가 욕까지는 아니더라도 걸걸한 대사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리얼한 욕설을 날리리라곤 짐작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건축한개론>의 한가인은 첫사랑이었던 20대의 빛나던 수지와는 다른 대상이다. 그녀는 세상의 떼를 탔고, 첫사랑의 주변을 서성이면서 추억을 곰씹는 대상이다.
그러나 엄태웅을 보며 그녀가 짓는 미소와 집이 다 짓고 햇살이 드는 잔디밭에 누워 잠들어 있는 엄태웅의 옆에 말없이 누워 훔쳐보는 신은 ‘영화 속 명장면’으로 오래 기억될 듯 싶다.
<건축학개론>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거기엔 많은 것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백을 등장배우들의 연기와 관객들의 상상으로 채워넣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엄태웅은 워낙 연기를 잘 하는 명배우니 따로 설명이 필요없고, 어린 승민역의 이제훈과 어린 서현역의 수지는 정말 앞으로 미래가 촉망되는 배우라고 밖엔 할말이 없다. 무엇보다 한가인의 놀라운 연기력은 30대 자신의 나이에 너무나 잘 맞아 할말을 잃게 만든다.
한가인을 미모가 아니라 연기자로 만난 첫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건축한개론>에서 그녀의 연기는 훌륭하다. 물론 그런 그녀의 연기가 녹아난 <건축학개론>은 너무나 잘 만들어진 작품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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