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신데렐라 언니’는 실패작?

朱雀 2010. 6. 5. 08:00
728x90
반응형

 


 

지난 3일부로 막을 내린 <신데렐라 언니>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 많은 이들은 <신데렐라 언니>의 중반 이후의 전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다. 시청자를 배려하지 않은 (한마디로 납득하기 힘든) 전개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이야기 전개는 소홀히 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모두 충분히 설득력 있고 제작진의 입장에선 새겨들어야할 이야기들이라고 본다. 허나 개인적으론 약간의 반론을 제기하고 싶다. 일부 언론매체들은 심리묘사에 치우친 나머지 30% 시청률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작’이라고 규정한다. 그게 과연 올바른 평가일까?

맞다. <신데렐라 언니>는 기존의 드라마와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제작진의 역량을 보았을 땐, 일반적인 이야기 전개가 충분히 가능했다. 이를테면 문근영을 악역으로 한다거나, 대성도가를 집어삼키려는 홍주가의 이야기를 전면에 부상시켜 얼마든지 시청률을 30%대로 견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당히 흥미로울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신데렐라 언니>는 주변소재로만 철저히 활용했다. 덕분에 홍주가의 사람들은 대성도가를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결국엔 암에 걸린 전본부장에 의해 허망하게 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신데렐라 언니>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동화의 현대적 재해석? 멜로의 해체? 문근영-천정명-서우를 내세운 멜로? 드라마를 본 이들은 공감하겠지만,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분명 <신데렐라 언니>는 시청률 경쟁이 제일 심한 수목극에 등장해, 중반 이후에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이야기 전개를 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스토리로 이끌어 나갔다.

이를테면, 은조는 구대성을 만나 처음으로 ‘아버지’란 존재를 느끼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외의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허나 평생 상처입은 들고양이로 살아온 그녀는 구대성이 죽을때까지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지 못해 평생을 죄책감을 가지고 살게 된다.

 

홍기훈은 홍주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원치 않는 미움과 괴로움속에서 살아간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을 미워하게 된다. 세상 모두를 미워하고 세상만사에 화를 내던 그는 구대성을 만나 처음으로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알게 되고, 제대로 인간답게 살게 된다. 허나 홍주가의 사람들은 그를 가만두지 않고, 결국엔 홍주가의 일원이 되어 어머니의 복수를 꿈꾸다가 의도와 다르게 구대성을 죽음에 몰아넣게 되고 그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된다.

송강숙은 평생 남자들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주는 구대성을 만난다. 그녀는 단순히 구대성이 ‘뜯어먹을게 많아서 사랑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가 죽은 뒤에야 알게 된다. 그의 8년이 넘도록 빼곡하게 적혀있는 일기를 읽으며, 그녀는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하게 사랑했음을 알게 된다.

구대성은 어떤 의미에선 ‘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모든 사람을 끝까지 믿고 가없는 사랑을 베푼다. 그의 사랑은 일종의 구원이다. 송강숙-은조 모녀는 그의 사랑으로 인해 불행에서 행복으로 옮겨가게 된다. 홍기훈은 그를 만나 사람답게 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의사와 다르게 그를 배신하게 된다. 송강숙은 그의 눈을 속이고 예전 남자를 만나고, 은조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으며, 기훈은 친아버지의 말에 넘어가 홍주가에 복수하기 위해 대성도가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구대성은 모든 것을 알고도 세 사람을 용서한다. 그리고 끝까지 믿어주고 받아들인다. 허나 그런 인간의 마음을 초월한 신은 결국 스스로의 존재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안타깝게도 세 사람은 그의 죽음을 접하고나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세 사람은 각기 자신의 지옥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송강숙에게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는 남편이 없고, 은조에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사라지고, 기훈은 은혜를 원수로 갚아 절망의 늪에 빠진다.

<신데렐라 언니>가 대단한 것은 ‘문학의 사망선고’가 내려진 오늘날, 가장 통속적인 드라마가 판을 치는 대한민국의 안방극장에서 죄와 벌, 복수와 용서, 화해와 구원 등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고민케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거기엔 무리가 따른 것도 사실이다. 시청자들은 기존의 관습적 이야기 전개를 벗어난 <신데렐라 언니>에 공감을 못하기도 하고, 매회 눈물을 보이는 문근영과 서우의 연기에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리고 결말부쯤에 이르러 은조-기훈의 러브라인은 분명 무리하게 급속하게 전개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시청률에 급급한 나머지, 음모와 배신은 물론이요, 치정과 막장이 판 치는 오늘날 드라마의 현실에서 자극적인 소재와 이야깃거리 없이 동화를 가지고 나름대로 새롭게 재해석하고, 다른 시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인간 본연의 문제를 고민케 한 <신데렐라 언니>의 의미는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비록 30%대에 못 이르렀지만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점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울러 <신데렐라 언니>를 통해 문근영은 좀더 연기의 폭을 넓혔고, 서우는 영화 <하녀>의 동반 흥행으로 이 시대 각광받는 배우의 목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PM의 택연도 최대한 무리하지 않은 출연과 대사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연기데뷔를 하게 되었다고 본다. 아쉬운 것은 제대후 첫 출연인 천정명에겐 아마 홍기훈이란 인물이 도통 감을 잡기 어려웠고, 이것이 그의 연기가 다소 딱딱해보이는 이유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신데렐라 언니>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판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고민케 했다는 점에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본다. 또한 무엇보다 ‘이런 식의 이야기도 시청자에게 어필할 수 있구나’라는 사례를 남긴 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비록 30%대 이상의 성공적인 시청률을 기록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도 <신데렐라 언니>는 충분히 성공작이 아닐까 싶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