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정조는 개혁군주가 아니었다?!

朱雀 2011. 2.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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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의 정조


 

며칠 전 김명민이 주연한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관람했다.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했고, 김명민-오달수-한지민의 연기가 워낙 좋아 비교적 재밌게 관람했다. 그러나 산만한 편집과 이야기전개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했다.

 

특히 남성진이 분한 정조에게 더욱 많은 눈길이 갔다. <조선명탐정>에서 묘사된 정조는 신하에게 ‘열녀문을 조사하라’면서 공납비리 사건을 몰래 조사하게 할 만큼 영리하게 묘사되었다. 그뿐인가? 위기에 몰린 탐정(김명민)을 도와주기 위해 임판서가 올린 세례자명단을 장안의 화제작인 ‘김상궁의 매력’ 3권과 바꿔치기 할 정도로 기지가 넘치게 묘사되었다.

 

명탐정 일행을 구하기 위해 친히 부대를 이끌고 당당하게 나서는 모습에선 군주의 위엄이 넘쳤고, 임판서를 책으로 때리면서 명탐정에게 몰래 윙크를 하는 장면에선 절로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조선명탐정>에서 노론의 영수로 나오는 가상인물인 임판서는 정조에 대해 ‘서얼을 등용하고, 화성 천도’에 대해 비판하고, ‘먼저 가면 주상이 따라올 것이다’라는 식으로 ‘정조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예고했다. <조선명탐정>에서 묘사된 정조의 군주상은 세밀한 부분에서 다소 차이가 생길 수 있지만, 오늘날 우리 대중에게 각인된 그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할만하다.

 

‘정조’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 미완의 개혁을 이뤄낸 젊고 강력하며 유능한 그러나 천운이 따라주지 않은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아닐까? 그리고 그가 1800년에 죽은 것을 고려하면 그 안타까움을 배가 될 수 밖에 없다.

 

중국 청나라의 경우 1839-42년까지 제 1차 아편전쟁을 겪고,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게 되고 이후 100년이 넘게 굴욕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일본 역시 메슈 페리에 의해 1854년 굴욕적인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되나, 오히려 이를 계기로 국력을 키워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정조의 사후 조선왕조는 세도정치로 60년을 보내면서, 서구열강이 세계 곳곳을 식민지화하던 시기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끝낸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지 않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일제강점기를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조가 개혁을 완수하고 적당한 후계자에게 물려줬다면...이란 의미없는 가정을 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정조가 조선왕조의 '마지막 기회'였단 생각을 떨칠 수 없기에-

 

개혁군주 정조의 이미지와 그의 독살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모은 작품으론 <영원한 제국>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영향을 받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은 대중적 관심과 지지를 불러 모았다.

 

이후 <이산> <바람의 화원> <성균관스캔들>을 통해 정조의 개혁군주 이미지와 독살설은 더욱 굳어져 갔다. 사실 정조의 일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아버지 사도사제는 모함을 받아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게 만든’ 노론 벽파와 파워게임을 벌였고, 규장각을 일으켜 학문을 세우고 체제공을 비롯하여 정약용 등의 남인을 등용했다. 또한 학문에 관심이 많고 안경을 쓰고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은 그야말로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2009년 2월 9일 무려 297통의 ‘정조어찰첩’이 공개되면서 이런 이미지가 역전되었다. <정조의 비밀편지>는 정조가 직접 쓴 편지인 ‘어찰’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우선 공개된 ‘정조어찰첩’은 심환지에게 보낸 것이며, 1800년 정조가 죽을 때까지 4년 동안 보낸 것들이이다. <정조의 비밀편지>가 파장이 클 수 밖에 없는 것은 심환지가 당시 좌의정을 지낸 인물로 노론 벽파의 거두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노론 벽파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원흉이며, 정조와 대립각을 몹시 세운 ‘정조독살설’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기 때문에 그 여파가 클 수 밖에 없다. 정조가 직접 쓴 어찰은 심환지에게 단순히 안부를 묻는 내용이 아니라, 때론 그를 질책하고 회유(?)하면서 막후정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정조는 어찰을 심환지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고, 체제공을 비롯한 주요대신들에게 다수에게 자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정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남인을 중용하고 서얼을 들여, 노론과 정치적 대립각을 세운 것이 아니라, 몇몇 실세들과 판을 짜고 정치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이는 정조가 우리가 생각하는 개혁군주가 아니라 그저 ‘노회한 정치가이자 음흉한 군주’라는 다른 면을 일깨우게 한다. 물론 ‘정조어찰첩’은 중요한 증거이며, 기존의 독살설을 뒤집는 ‘특별한’ 자료임에 틀림없다-어찰에선 죽음에 임박한 정조가 자신의 병증과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자주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정조의 병증이 극비리였다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실제론 궁에서 그의 병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는 게 맞을 듯 싶다-.

 

그러나 저자 안대회가 밝힌 것처럼 조선판 마키아밸리즘의 선봉이 정조였다면, 거꾸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찰의 내용을 꾸미거나 유리하게 바꿨다는 생각을 해봄직 하지 않을까? ‘정조어찰첩’은 ‘정조독살설’을 부정하던 기존 사학계에 든든한 무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정조독살설’을 부정하고 정조의 개혁군주적 이미지를 상쇄시키기 전에, 우리가 아는 정조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과 더불어 ‘정조’를 단순히 이분법적인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노론-소론-남인 등의 정치적 세력을 아울렀던 전제군주로서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필자가 생각하는 ‘정조어찰첩’의 또 다른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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