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라디오가 없었다면, 루스벨트 대통령도 히틀러도 없었다!

朱雀 2011. 2. 1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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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사 산책>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바로 라디오와 관련한 부분이다. 1938년 미국의 라디오 보급률은 무려 80%에 달한다. 당시 라디오의 영향력은 <화성인의 습격>사례를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라디오 드라마인 <화성인의 습격>을 들은 청취자들은 실제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소방서를 비롯한 정부기관에 연락하고, 피난길에 나서는 등의 대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루스벨트 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하반신 불구였다.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말이지만 만약 루스벨트가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TV로 생중계했다면, 국민들은 그를 뽑지 않았을 것이다. -하반신 불구의 루스벨트에게 누가 표를 줬겠는가?-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목소리만 가지고 국민들은 그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웅변술의 대가라고 할만하다.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은 어린시절 부둣가에서 대통령을 기다리다가, 루스벨트 대통령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내려지는 것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둣가에 내릴 후 연설을 통해 그런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두가 웃으면서 그를 따를 수 밖에 없게 만들 정도였단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 집집마다 보급된 라디오를 잘 활용했다. 훗날 노변담화라고 알려진 라디오 담화 프로그램은 기존의 딱딱하고 권위적인 정치연설에서 벗어나, 마치 난롯가에서 가족끼리 이야기를 나누듯 친근하고 정겨운 말투로 이야기를 했다. 대공황 시절, 루스벨트는 국민들에게 은행의 예금을 빼나가지 말아줄 것을 호소했고, 국민은 그를 믿고 진정했다. 이런 국민적 믿음을 바탕으로 루스벨트는 강력한 뉴딜정책을 시행했고, (미국은) 대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당시 독일에선 히틀러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미 1914년부터 두각을 보였다! 그는 최면술사의 대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웅변술의 소유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히틀러가 히스테리를 부리듯 강압적으로 말하는 듯한 모습이나 그가 벌컥 화를 내는 모습 등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는 가끔 있는 일이다-또는 그가 패망하기 직전의 일이다-.

 

독일 국민에게 히틀러는 적절한 유머와 성대모사 그리고 재밌는 말솜씨의 소유자였다. 히틀러의 지적수준은 그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높았다. - 아놀드 토인비조차 극찬할 정도로 - 그는 모든 말과 동작하나를 계산해서 움직였다. 즉 어떻게 해야 주변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쫓게 할지 고민했다는 말이다. 이는 그가 총통이 되어 다스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스벨트도 히틀러도 당시 보급된 라디오가 없었다면 아무리 천재적인 웅변술을 지니고 있었어도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하반신 불구, 히틀러의 작은 체구와 볼품없는 외모의 신체적 약점이 존재했다- 이들은 당시 보급된 라디오를 잘 활용해서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이를 통해 지도자가 되고 나라의 경제적 어려움(미국은 대공황-독일은 1차대전이후 피폐해진 상황)과 제 2차 세계대전의 격류를 해쳐나갔다. 따라서 전쟁 전까지 두 사람이 서로 호의를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독히 자기자신을 사랑하고 자존심이 높았으며, 천재적인 기억력의 소유자이며, 손짓하나까지 치밀하게 계산해서 연출할 정도(물론 이는 피나는 연습이 동반되었다)의 비슷한 인물들이 서로 끌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루스벨트의 입장에선 파시즘이 공산주의의 전파를 어느 정도 막아줄 거라 생각했다. 이는 나중에 철저한 오판으로 드러났지만-



참고: <미국사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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