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낙서장

가을비를 홀딱 맞으며 둘레길을 걸은 사연

朱雀 2011. 10. 1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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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이었다. 집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한가로움을 맛보고 있었다. 문득 핸드폰의 진동음이 들렸다.

 

“여! 웬일이냐? 늘 바쁜 분께서?”

“저기... 내일 시간되세요?”

“나야. 늘 한가하지.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이 진행하는 행사에 취재하러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산행이라 조금 귀찮긴 했지만, 취지가 마음에 들어서 그냥 가기로 했다.
 

지난 15일 오후 2시, 행사장이 도봉산이라 집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이 되질 않아서 여유 있게 도착했다. 그러나 워낙 도봉산에 가보질 않은 탓에 행사장을 찾지 못해 10분 정도 헤맸다. 누구랑 같이 가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함께 갔으면 많이 혼날 상황이었다. -_-;;;

 

행사장에 도착하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가을비는 추적추적 오지, 날씨도 갑자기 추워져서 많이 오지 않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꽤 많은 인파로 붐비어서 적잖이 놀랐다. 행사장에서 보니, 그동안 LG 하우시스와 100인 이사회가 함께 한 선행 이야기들이 꾹꾹 쓰여져 있었다.

 

100인 이사회는 탤런트와 영화배우 등의 연예인들이 함께 공연과 사회적 기부를 하는 기업이었고, LG 하우시스는 이들과 함께 어린이집과 노인정 그리고 북한산 둘레길에 자연쉼터를 만드는 일을 해왔었다. 물론 LG하우시스는 기업인 만큼 친환경 제품 소개를 함께 겸하고 있었다. '역시 뜻 깊은 행사라, 날씨가 궂은데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지경이었다.

 



아이의 뚱한 표정이 의외로 재밌어서 찍어 보았다.


원래 이날 행사는 북한산 둘레길을 약 3시간 정도 걷는 게 중요한 행사였다. 그러나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기대는 철저하게 배반당했다. 코스를 반으로 줄이긴 했지만, 결국 둘레길 걷기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말았다.

 

덕분에 잘 되지도 않는 영어발음으로 ‘오마이갓!’을 외치며, 평상시에도 잘 오지 않는 산길을 비를 맞으며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현장에서 우비를 나눠줘서 입긴 했지만, 카메라를 들고 있는 통에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갑갑해서 우비는 잘 입지 않는데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해 우비로 둘둘 싸서 임시방편으로 활용해야 해서, 사진을 찍고 이동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상시라면 3시간 정도 걸어도 나름 즐거웠을 것이다. 그런데 걸을수록 거세지는 가을비를 맞으며 걸으니 전화를 걸어온 녀석에 대한 원망만이 가득해졌다. ‘나쁜 녀석. 왜 이런 데를 가라고 부탁한 거야?’ 평상시에 그냥 카메라만 들고 가도 힘든 길을 비를 맞으며, 중간 중간 사진을 찍으며 가는 힘들 수 밖에 없었다.

 

근데 조금 걷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짜증내고 화내봐야 나만 손해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편히 마음을 먹어보자’ 이 행사는 LG하우시스의 상품 홍보도 겸했지만, 기본적으로 친환경을 위한 행사였다.

 


<광개토태왕>에 출연중인 임호씨가 100인이사회 일원으로 참가해서 뜻을 더했다.


기점마다 패스포트에 에코 스탬프를 받는 방법은 나름 재미를 주었다.

걷는 중간에 보니, 장애인이 둘레길을 걸을 수 있는 구간도 공사중이었고, 시민들이 좀 더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다리를 비롯한 구간들을 만드는 곳들도 눈에 자주 띄었다.

 

평상시 도시에 살면서 매일 똑같은 회색빛 풍경에 익숙해져 있다가, 비록 비를 맞으면서 걷지만, 이런 상황에 들어서니 기분이 매우 독특했다.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걸으니 더욱 묘했다.

 


비를 맞으면서 도장을 꾹꾹 눌러주는 그들의 모습은 묘하게 아름다웠다.

마음을 바꾸고 보니, 연인끼리 온 팀도 있었고, 가족끼리 오순도순 손을 잡고 온 팀들도 보였다. 걷다보니 둘레길 근처에 묘지가 보였다. 어느새 우리 곁에서 추방되어 묘지가 모여 있는 곳이 아니면 잘 볼 수 없는 묘지들이 종종 보여서 묘한 기분이 휩싸였다.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 같았다. 길 옆에 위치한 묘지는 ‘삶과 죽음은 항상 동반자’라는 당연한 메시지를 진하게 던져주었다.

 

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또 다른 상황은 밭에 꽂혀있는 우산들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세워둔 지는 모르겠으나, 묘한 우산의 배치는 비오는 상황과 겹치면서 남모를 즐거움을 나에게만 주었다.

 

그냥 걷기만 하면 재미없는 법! 이번 걷기 행사에는 ‘패스포트’가 증정되었고, 거기에 에코 스탬프를 받아야 했다. 받으면 중간에 에너지 바도 주고, 나중에 참석한 이들에게 경품을 주는 행사도 있단다. 근데 이게 묘한 재미를 주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숙제를 하고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받는 기분이랄까?

 

스탬프를 받는 곳마다 환경오염에 대한 메시지와 더불어 LG하우시의 홍보를 겸한 푯말은 꽤 효과적인 발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탬프를 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 것은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었다.

 

가을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다보니 나름대로 운치도 있긴 했지만, 역시 힘들었다. 반환점에서 에너지바를 나눠주는 곳에 가까워 질때는, 정말 너무 배가 고파져서 먼저 한입 깨물고 있는 아이가 괜시리 미워질 정도였다. 새삼 ‘내 인간성의 깊이가 이정도인가?’하고 반성도 많이 했다.

 


중간 지점에서 먼저 초코바를 먹고 있는 아이를 보며 얼마나 부러웠던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비가 정말 많이 내렸다. 평상시에도 잘 가지 않는 산에 하필 비를 맞으며 걷게 되다니,
내 인생의 흔치 않은 경험을 한 날이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러모로 느낀 바가 큰 유익한 행사였다.

그리고 점점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상념에 빠졌다. 나는 항상 목적지에 빨리 가고자 했다. 남들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부끄러워했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산행을 하면서 조그만 에너지바에 기쁨을 느꼈고, 마침내 목적지에 돌아왔을 때는 다른 곳에선 느끼지 못할 희열을 느꼈다.

 

거기선 수고했다고 간단한 마실거리와 먹을거리가 제공되긴 했지만, 커다란 보상 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나는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정말로 알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일까? 내겐 너무나도 당연한 산행이 그 누군가에겐 절실히 가고 싶어도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길이라는 걸 알고 있나? 길을 가는 과정은 무시한 채, 너무나 목적지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은 아닐까?

 


결승점(?)을 알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반가웠던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의자에 퍼져 앉아 있는 데, 한 초청가수의 목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지금은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기억조차 남지 않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만은 기억난다. ‘삶은 이래서 살아볼만 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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