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도올 선생이 ‘섬머타임’을 부른 이유는?

朱雀 2011. 11. 2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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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평소와 같이 <중용> 강의를 듣다가 마지막 부분에 놀라고 말았다. 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그 유명한 <섬머타임>이란 재즈곡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듣는 순간 ‘제 점수는요?’라는 유명한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 했다. 사실 김용옥 교수의 노래실력은 듣기에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필자처럼 평상지 도올 선생의 저서를 읽고 방송을 즐겨듣는 이라고 해도, ‘잘 부른다’라고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나가수>를 비롯하여 <슈퍼스타 K> <불후의 명곡 2> 등등의 노래경연 프로그램이 방송편성표를 화려하게 수놓은 오늘날의 현실에선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근데 여기서 몇 가지 집중해서 볼만한 대목이 있다.

 

우선 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중용> 강의 중에 ‘섬머타임’이란 노래를 불렀냐? 하는 것이다. 강의와 상관없이 자신의 노래실력을 뽐내고 싶어서? 평상시 도올 김용옥 교수는 장르와 형태를 가리지 않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토로했기 때문에 자신이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넌지시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용>의 저자인 자사의 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공자시다! 공자께선 평상시 악기를 가까이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스스럼없이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였다. 공자가 만든 커리큘럼인 ‘육예(禮樂射御書數)’에 두 번째로 당당히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참고로 중화TV에서 방송되었던 100억원이 투입된 드라마 <공자>에서도 젊은 공자가 음악을 배우기 위해 대가 앞에서 십년이 넘도록 청하는 대목이 있을 만큼, 그는 음악을 사랑했다.

 

따라서 공자의 말을 강의하는 도올 선생은 공자처럼 음악을 사랑하고, 자신 역시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고 대놓고 표현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더 살펴보면, <섬머타임>의 내용은 23강인 <중용> 12장의 ‘어약우연 漁躍于淵’을 떠오르게 한 탓이 컸다.

 

Fish are jumping, and the cooton is high

Oh, your daddy's rich, and your mom is good looking.

So hush, little baby, don't you cry.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남녀의 삶을 이야기한 ‘섬머타임’의 구절에서 도올 선생은 <중용> 12장의 내용을 보았다. ‘솔개는 치솟아 하늘에 다다르고, 잉어는 연못에서 튀어오른다. 이것은 그 도가 위와 아래에 모두 찬란하게 드러남을 은유한 것이다. 군자의 도는 부부간의 평범한 삶에서 발단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지극함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에 꽉 들어차 빛나는 것이다.’ -<중용> 12장 夫婦之愚章에서

 

 

 

재즈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다. 도올 선생은 재즈의 위대성에 대해 미국이란 존재를 걸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섬머타임’은 거슈윈이 지은 흑인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아리아중의 하나로, 빌리 홀리데이와 루이 암스트롱처럼 전설적인 가수들이 단독곡으로 부르면서 매우 유명해진 곡이다.

 

아마 ‘섬머타임’이란 제목은 몰라도 노래를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아!’하고 무릎을 치게 될만큼 많이 들어본 곡이다. CF와 영화에 자주 삽입되는 이 곡은 그저 멋있는 곡이 아니다. 노예생활을 오랫동안 할 수 밖에 없었던 흑인들의 슬픔과 애환이 절절하게 녹아있는 이 노래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에 대한 모습이 너무나 구구하게 그려져 있다.

 

도올 선생은 많은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 그가 만약 강의 중간에 재주가수들을 초빙하려 했다면, 아마 누구라도 나섰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도올 선생이 그러지 않고 스스로 노래를 부른 것은, 비록 잘 부르진 못하지만, 자신의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의 기교나 화려함에 아니라, 노래 자체에 집중해서 듣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노래방에 가는 이유는 물론 가급적이면 잘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듣고 싶은 노래를 맘껏 부르고 듣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노래를 잘 하지 못함에도 노래를 부르는 것은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삶을 찬양하고 관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다른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기 위함이 아닐까? 필자는 감히 그런 지점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가 ‘섬머타임’을 불렀노라고 주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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