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의 '미실'은 요부적인 매력과 청순한 느낌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가히 여신급 포스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연기자로 평가받기엔 아직 여러모로 부족하다.
최근 재밌게 보는 드라마가 두 개 있다. <선덕여왕>과 <찬란한 유산>이다. 한동안 드라마를 보지 않다가 보게 된 이유가 있는데, <선덕여왕>은 워낙 주변의 호평탓이었고, <찬란한 유산>은 동생이 보던 걸 우연히 보면서 급속히 빠져들게 되었다.
<선덕여왕>과 <찬란한 유산>이 오늘날 같은 인기를 끄는 데는 악당 역할을 맡은 두 배우의 영향이 지대하다고 본다. 바로 미실역의 고현정과 악독한 새엄마 백성희역의 김미숙이다. 고현정은 신라황실을 장악한 희대의 요부 역할을, 김미숙은 돈을 위해 정략적으로 결혼하고 남편과 남편의 아이들을 버리는 희대의 악녀로 출연중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연기는 천지차이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나름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으나, 고현정의 연기는 지적할 부분이 많다. 그녀의 연기는 이전까지 보여줬던 현대극과 별반 다를 것이 없고, 그녀외엔 다른 배역이 눈에 띄질 않는다. 최근엔 그녀의 배역을 출연 시간을 줄여 덕만에게 할애한 것도 이러한 부분이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본다.
반면 김미숙은 다르다. 그녀는 눈빛부터 ‘악녀’다! 대사 한마디 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어떻게 하면 속일까?’ ‘어떻게 하면 내가 이득을 볼 수 있을까?’ 등등을 생각하는 악녀로 비춘다. 그녀의 눈빛 한번, 손짓 하나 계산되지 않고 연기되지 않는 게 없다. 그러면서 김미숙은 전면에 화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비련의 여주인공인 고은성역의 한효주와 부잣집 망나니 도령인 선우환의 이승기가 더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김미숙의 연기가 소름끼치도록 악독해서 시청자들이 한효주를 더욱 아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미숙의 연기는 심후하면서 동시에 다른 연기자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고현정의 미실은 그런게 없다. 고현정은 그녀의 다른 출연작을 봐도 오로지 그녀만 돋보인다. 물론 그녀자신에겐 이것도 좋은 일이다. 대부분의 연기자는 빛도 발하지 모하고 도중하차하거나 주연 역할 한번 하지 못하고 스크린에서 사라지는 일이 다반사인 요즘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고현정이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나고 싶다면 김미숙에게서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김미숙이 누구던가? 그녀는 (내가 알기론) 이번 드라마 전까진 항상 착하고 우아한 역할만 주로 맡아서 하던 인물이다. 지금 한효주가 당하는 역할은 나이가 좀 더 들었다 뿐이지, 항상 김미숙이 전매특허로 맡아오던 역할이다.
그냥 보기에도 선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김미숙이 <찬란한 유산>에서 보기만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의 악역을 연기해내는 건 그저 놀랍다. 오랜 연기 내공의 힘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런 김미숙이 악역으로 강하게 각인된 게 영화 <세븐 데이즈>였다. 여기서 그녀는 이전까지 보여줬던 지적이고 착한 역할을 전반부에 연기한다. 그리고 후반부엔 자신의 복수를 위해 자연(김윤진)의 아이를 유괴한 범인으로 재등장해 관객을 놀래킨다. 그녀가 결말부에 보여주는 눈빛과 표정연기는 그 자체 압권이었다.
그리고 <찬란한 유산>! 김미숙의 악역 연기는 너무나 완벽하고 훌륭해서 그 전까지 해왔던 선한 역할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다. 얼굴만 쳐다봐도 한 대 갈겨주고 싶을 만큼 표독스러운 표정과 가증스런 눈빛 연기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찬란한 유산>을 시청할 값어치를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상대방과 노련하게 합을 주고 받는 노련한 연기는 그녀의 끝을 알 수 없는 심오한 연기내공을 짐작케 할 뿐이다.
물론 <선덕여왕>의 고현정은 지금도 훌륭하다. ‘시대의 요부’로서 교태스런 눈빛 하나로 뭇 남성을 자신의 치마폭에 쌓아놓고 지내는 미실을 멋지게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연기자들과 주고 받지 못한다. 일방적이다. 자신의 연기만 줘버리고 도무지 받을 생각이 없다. 덕분에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다른 이들의 연기는 짓뭉개진다. 아마 그런 그녀의 연기성향은 너무나 오랫동안 ‘받들어 모셔지며’ 연기를 해온 탓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고현정의 연기내공도 그리 녹록친 않다. 1993년 <엄마의 바다>, 1995년 <모래시계>등에서 보여준 청순가련한 이미지에서 오늘날 털털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오기까지 그녀는 매우 노련하고 영리한 행보를 보여왔다. 따라서 나는 그녀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다고 믿는다. 지금에서 만족하느냐? 아님 (비록 저 하늘의 별처럼 빛나긴 하지만) 김미숙 만큼의 연기를 보여줄 것이냐?는 전적으로 고현정이 노력하기에 달렸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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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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