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 진부하기 쉬운 21세기판 ‘콩쥐팥쥐’전인 <찬란한 유산>은 톡톡튀는 감각의 대본과 출연자들의 호연 그리고 멋진 연출이 그야말로 삼박자를 이루면서 최고의 주가를 오르고 있다. 특히 부잣집 아가씨에서 나락까지 떨어지는 한효주와 어린 시절 충격으로 다른 사람에 못되게 굴지만 아주 미워할 수 없는 이승기는 <찬란한 유산>에서 가장 돋보일 수 밖에 없는 위치다. 그러나 최근 다소 무리한 삼각관계 설정과 힘이 빠진 듯한 악역 캐릭터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나는 드라마를 그리 챙겨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광하면 그제서야 찾아보거나, 여동생이 보는 것을 우연히 함께 보다가 챙겨보는 게 다반사다. <찬란한 유산>은 후자다.
아무런 생각 없이 첫회를 받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찬란한 유산>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것은 첫째가 대본이다. 현대판 <콩쥐팥쥐전>이라 해야 하나? 아님 <신데렐라>? 어찌되었든 많이 봐온 설정들이다. 그러나 그 전개는 사뭇 새롭다.
풍족하게 잘 살던 집안이 쪽박을 차는 설정은 진부해보인다. 그러나 빚쟁이들을 모아 놓고 엄히 경고하는 김미숙의 모습은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녀의 독기어린 눈빛은 그 자체로 내가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유가 되었다.
도무지 이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이 안 간다. 물론 큰 틀에서 결국 이승기와 한효주가 서로 사랑하게 되겠지만, 어떤 결론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되고 궁금하다.
부잣집 철부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억척스럽게 변하는 한효주의 모습은 너무나 눈물겨웠다. 술집 종업원까지 했을땐 ‘설마 술집 여인이...’될까 했지만 그건 다음 전개를 위한 포석이었다. 거기서 부잣집 망나니 도령 때문에 동생을 잃고 실신하는 모습과 현대판 키다리 아저씨인 준세의 도움을 받는 장면등은 진부하지만 ‘저렇게 고생했는데 그래 저런 사람이라도 있어야지’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영리하다. 분명 여기엔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들을 모아놨다. 주인공의 모든 재산을 빼앗고 심지어 아빠와 동생까지 못 만나게 만드는 나쁜 새엄마. 새엄마와 함께 들어온 유승미. 비록 그녀는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자신의 사랑인 선우환과 이루어지기 위해 엄마의 계략을 방조하고 심지어 소극적으로 돕기까지 한다. 정말 세상의 나락까지 떨어져 밑바닥을 경험하지만 ‘소공녀’처럼 오똑하니 일어서는 주인공. 괴팍한 노인네를 만나 준재벌급 재산을 상속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고, 그집 도령과 때론 다투고 서로 도우며 묘한 감정이 싹트게 된다.
그뿐인가? 고은성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키다리 아저씨가 있다. 인간 네비게이터인 그는 고은성이 어디에 있든 짠~하고 나타나 도와준다. 어제 방송분에선 정식 연인이 되고자 프로포즈했는데,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하다.
두 번째는 연기자들이다. 한효주와 이승기를 비롯한 모든 주조연급의 연기는 훌륭하며 각자 자신의 맡은 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마치 잘 맞아 돌아근 톱니바퀴처럼 한치의 오차 없이 최선의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이보다 우아한 악역은 없다! 인자하고 선한 역할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미숙은 <찬란한 유산>에서 자신과 딸을 위해 주변을 철저히 이용하고 버리는 냉혈한으로 등장한다. 손짓 하나, 눈빛 한번까지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그녀의 연기는 보는 이가 이를 갈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최근엔 분량탓인지 대본의 문제인지 뭔가 힘이 빠진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가장 인상 깊은 연기자는 역시 김미숙! 그녀가 선보이는 우아한 악녀는 시청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TV드라마에서 우아하고 착한 역할을 도맡았던 김미숙은 여기서 자신과 친딸을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철저히 이용하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한효주와 대척점에 서는 그녀는 철저하게 세상 물정 모르는 한효주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린다. 도무지 송곳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과 한 번의 눈빛과 손길조차 ‘철저히 악당인’ 그녀는 너무나 악독해 모두가 한효주가 연기하는 고은성을 열렬히 응원할 수 밖에 없다.
토크쇼에 나온 중견 연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악역을 하다보면 현실로 착각한 일반 시민이 종종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때리는 경우까지 있다던데, 김미숙은 이번 드라마로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고은성역의 한효주도 훌륭하다. ‘한효주의 재발견’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던 착하고 밝은 여성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자살’이란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기까지의 과정을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시청자에게 전해주었다. 그러나 현재 한효주가 누리는 인기에는 그녀를 돋보이게 만드는 악역인 김미숙의 후광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의외의 연기력을 선사하는 훈남이 있다. 바로 ‘나쁜 남자’ 이승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예전에 ‘논스톱’이란 시트콤에 나온 적이 있는데, 당시만해도 연기가 되게 어색했다. ‘아! 역시 전문 연기자가 아니라서 어쩔 수 없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찬란한 유산>에선 그동안 연기를 갈고 닦았는지 반짝반짝 눈이 부실 정도다(<소문난 칠공주>에서도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지만, 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번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발음이 조금 어색한 느낌도 살짝 들지만, 오히려 무뚝뚝하고 다소 못된 선우환 역할에 잘 맞는 것 같다. 이승기의 나쁜 남자 역할은 많은 시청자들을 놀래켰다. 선한 외모 탓에 그는 데뷔초부터 ‘착한 남자’를 도맡아왔다. 비록 드라마는 아니자만 ‘1박 2일’에서 그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들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기존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나서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는 것도 이승기를 매우 칭찬해주고 싶은 부분이다. 그 외에 진성식품의 회장을 연기하는 반효정과 출없는 엄마를 연기하는 유지인 등의 호연이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에 충분한 것 같다.
세 번째는 당연하지만 연출이다. 아무리 잘된 대본과 좋은 연기자들이 있어도 연출이 잘 되지 못한다면 볼만하지 못하다. <찬란한 유산>의 전개를 보고 있노라면 잘된 연출과 편집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조금만 더 잡아도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장면이 적절한 화면 분할과 시간 배열로 더욱 볼만해졌다.
물론 <찬란한 유산>이라 해서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볼만 하긴 하지만 역시 ‘현대판 캔디’인 고은성은 현재 조금 애매한 상태다. 동생을 잃어버리고 괴로워하던 그녀가 명랑하게 웃고, 재상 상속을 받기 위해 2호점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어딘가 조금 맞지 않은 느낌이다. 동생을 찾는 모습을 더 보인다거나 괴로워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어제 방송분에서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준세에게 ‘아직은 자신이 그럴 상황이 아니라’던가, ‘나같은 애는 웃으면 안돼나?’식으로 말하면서 시청자의 그런 생각을 파고 들지만, 역시 한계는 있다. 현재 고은성의 캐릭터는 다소 무리하게 박준세와 선우환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하다보니 애매해진 부분이 있다고 본다.
출연 분량의 탓이겠지만, 현재 가장 악당인 김미숙이 별다른 ‘음모’를 꾸미지 않는 부분도 안타깝다. 초반에 보여줬던 그녀의 악독함은 현재는 고은성에게 ‘당한다’라고 생각될 정도다. 이는 은우를 잃어버리게 한 이후로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는 탓이 크다 여겨진다. 악당은 모름지기 끊임없이 음모를 꾸미고 주인공을 괴롭혀야 하는데, 최근 김미숙의 행보는 그런 게 부족하다.
착한 팥쥐를 연기하는 유승미는 여러 모로 아쉬운 캐릭터다. 본래 착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선우환을 차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엄마의 음모에 동참하는 그녀는 최근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표정이다. 엄마의 음모에 열렬히 동참하지도, 점차 고은성에게 마음을 뺐기는 선우환에게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초반부에 엄마의 음모를 알고 괴로워하면서 고은성과 은우를 도우려 하다가, 자신의 행복 때문에 포기하는 등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것을 떠올리면 말이다.
인간 네비게이터이자 현대판 키다리 아저씨인 박준세역의 배수빈 역시 아쉽다. 그는 나름 매력적인 캐릭터이지만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 <꽃보다 남자>의 윤지후보다 매력이 떨어진다. 고은성을 곁에서 하염없이 도와주는 캐릭터는 사실 현실적이지 못하다.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레스토랑을 위해 아버지의 거센 요구도 거절하는 그가, 고은성을 위해 레스토랑일을 팽개치고 도와주고 다정한 말을 해주고 모든 것을 이해준다는 것에서 그렇다.
현대의 여성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해야 할 대상인 ‘박준세’는 충분한 매력을 어필하지 못한 것 같다. 여기엔 박준세란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지 못한데서 오지 않았나 싶다. <꽃보다 남자>의 윤지후는 비록 연기는 잘 못했지만 나름 매력이 있었다. <내조의 여왕>의 태봉씨는 윤지후의 10년뒤 버전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깐죽거리면서 도와줄 건 다 도와주는 그런 설정은 꽤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베풀고 배려하고 이해해주는 박준세는 너무나 멋진 탓에 ‘비현실적’인데, 배수빈은 박준세를 시청자들이 현실화 시키는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아쉽다. 박준세는 지금도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그런 재해석 과정이 따랐다면 훨씬 인기를 끌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16회까지 방송된 <찬란한 유산>은 전체 분량의 반을 조금 넘는 지점에 와있다. 앞으로 고은성이 어떻게 자신의 동생과 아버지를 찾고 행복해질지, 김미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몰락하게 될지 나를 비롯한 시청자들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보고 있다. 바란다면 지금처럼 진부하지 않게 새로운 방법으로 과정을 그려냈으면 한다. 아울러 어쩔 수 없겠지만 박준세와 선우환 사이에 끼게 되는 고은성의 처지를 좀더 공감할 수 있게 그려냈으면 좋겠다.
동생을 찾기 위해 선우환과 유산 경쟁을 펼치는 그녀가 현실성을 조금씩 잃어가는 현상황에선 더더욱 말이다. 아울러 ‘악당’인 김미숙이 궁지에 빠져 어떤 처절한 모습을 보여줄지 개인적으로 기대된다. 악역이 철저하게 망가질때 시청자는 또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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