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독서의 즐거움

상상의 금기를 깬 ‘무림파괴자’

朱雀 2009. 12. 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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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귀재라 불려 마땅한 작가 안병도의 따끈따끈한 신작 되시겠다. 제목에서 풍기지만 <무림파괴자>는 ‘무협’의 세계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주인공 안진현은 현실에선 별 볼일 없는 사내다. 그는 4년제 서울 변두리 대학을 중퇴한 학력에 88곳의 회사에 입사원서를 넣다가 88번 떨어진 정말 보잘 것 없는 27세의 남자다.

그런 진현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슈나이더라는 인물에게 밑도 끝도 없이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느냐?’란 질문과 함께 검은 색 가방만 딸랑 하나 받은 체, 이계로 떨어진다. 바로 검기를 내뿜고 기인이사들이 살아 숨 쉬는 무협(?)의 세계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슈나이더는 진현을 무협세계로 보내면서, 그 세계의 일인자를 꺾으면 다시 현실세계로 돌려보내주겠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받는다.

-참고로 슈나이더 백작은 안병도 작가의 다른 작품 <사이버고스트>에 등장하는 악당이다. 즉 이 작품에 등장함으로써 작가만의 패러럴 월드를 구축했다 할 것이다-

진현은 자신을 우연히 구해준 탁목자에게 무술을 배우려 하지만, 아뿔사! 그는 천심무허지체로 내공을 전혀 쌓을 수 없는 몸이었다.

포기직전에 이른 진현은 슈나이더 백작이 준 검은 가방을 열어보곤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거기엔 권총과 총알들이 들어있었다. 진현은 무협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술을 익히는 대신 속사 기술등을 익혀 건사격술의 달인 탄검신마라는 스스로에게 별호를 붙이게 된다.

아마 여기까지 대강의 스토리라인을 말하면 아마 많은 분들은 <극악서생>을 비롯한 현대인이 이계로 진입한 판타지물을 쉽게 연상할 것이다. 물론 <극악서생>이 상당히 잘 된 소설이라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무림파괴자>는 그보다 몇수 위의 소설이라는 게 내 의견이다.

고증에 철저한 안병도 작가는 이번에도 충분한 자료조사와 능숙한 스토리 텔링으로 자신만의 판타지 월드를 완성시킨다. 진현이 쓰는 글록 17에 대한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무협인들의 초식과 실제 대결을 펼쳤을 때 어떤 가상 결과를 가져올 지 나름대로 시뮬레이션화 시켜 독자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그러면서 작가는 단순히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면서 겪는 혼란도 잊지 않고 서술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철저히 묘사되는 <무림파괴자>는 현실풍자와 다른 작품에 대한 패러디와 유머가 풍성하다. 가령 예를 들어 처음 언급한 88번 면접과 ‘월급 88만원이 황송하다’란 식의 표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대한 철저한 풍자라 할 것이다.

아울러 총기 결합 분해를 ‘운공’으로, 권총을 ‘신병이기’로 둔갑 시키는 작가의 재기발랄함은 매 페이지마다 등장해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그뿐인가? 백수여, 무림행 급행열차를 타라! 너희가 영웅을 믿느냐? 남궁세가에 어서 오세요! 첩혈쌍웅 등의 소제목을 비롯해 작품 곳곳에 유명영화와 애니메이션들을 패러디해 마니아들의 숨은 글 찾기(?)란 재미를 톡톡히 이끌어낸다.

<무림파괴자>는 제목 그대로 기존의 무협소설과 판타지소설의 공식과 설정 등을 하나하나 깨버린다. 우선 주인공 진현이 10대나 20대 초반이 아닌 20대 후반의 남성이란 점이 그렇다. 오늘날 일본 그렇지만 10대 초반의 소년들이 주인공인 이유는 어린 청소년들과 자기 동일시를 통해 최대한 작품의 유명세를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작가는 이에 철저히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인생의 쓴맛을 본 진현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황당한 무협세계에 빠진 악조건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떤 면에서 진현의 노력은 우습다. 그는 검기로 산을 부술 수 있고,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괴물들을 상대로 총을 써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최신식 병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에겐 세력도 돈도 없다. 오히려 탁목자에게 몸을 의탁하면서 연아라는 눈먼소녀를 책임지게 되고, 유일하게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여운형은 여러 가지 이유로 번번이 헤어지게 된다. 사파가 정파를 누르고 압도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는 흉계에 휘말려 일월신교와 맞짱을 뜨는 최악의 상황까지 도래한다.

검기로 철을 베는 괴물들을 상대로 그는 죽음직전까지 가는 처절한 상황에 몇 번이고 빠져든다. <무림파괴자>는 그동안 <일본정벌기> <광개도태왕정벌기> <난중기담> 등의 역사와 판타지가 혼합된 묵직한 팩션을 쓰던 작가가 가볍고 재밌고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작심하고 쓴 ‘B급 소설’이다.

따라서 여기선 이전 작가의 발표작과 달리 정말 쉽게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진현이 내뱉는 지극히 개그스런 대사와 기존의 무협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정상황에 대한 반전(현상금을 노리는 나타나는 산적, 최고실력가의 딸이 걸린 의문의 병, 춘약을 먹고 괴로워하는 미녀)등을 통해 관객에게 엄청난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또한 유명한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제목과 상황 등을 패러디해 넣은 장면과 명칭 등은 찾아내는 재미를 준다.

그렇지만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도 명징하게 살아있다. 진현은 자신이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고, 무림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고찰을 시도한다. 또한 그러한 진현의 고민과 분석을 통해 우린 그저 재미와 흥미로 보았던 무협과 판타지 세계를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니 저리니 해도 <무림파괴자>는 일단 재미있다. 아마 기존 무협소설에 질린 이들이나, 판타지소설에 질린 이들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특히 1, 2권 모두 한참 재밌을 때 끝나버려 다음 권을 찾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만드는 마력을 발휘한다. 아마 독서에 능숙한 이라면 아마 2-3시간만에 현재 출간된 2권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그 중독성이 심하다.

<무림파괴자>를 읽고 나면 아마 이전까지 안병도를 몰랐던 이들도 기대를 가지고 다음 권을 기다릴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그만큼 <무림파괴자>는 최근 나왔던 무협+판타지 소설에서 몇 발자국 더 발전한 작품이라는 게 필자의 견해다. 1부만 8권으로 예정된 <무림파괴자>가 1-2권 정도의 완성도를 계속 간직한다면 기존의 <묵향>과 <비뢰도>이상의 인기를 끌지 않을까 싶다(완성도는 <묵향>과 <비뢰도>보다 분명 몇 수 위다). 그만큼 <무림파괴자>는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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