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마오쩌둥과 진시황제는 닮았다?

朱雀 2011. 1.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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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제 -사진 출처: 위키백과


진시황제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불로장생의 약을 애타게 찾은 황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인물? 호화로운 궁전인 아방궁을 짓게 만든 장본인? 1974년 3월 발견된 이래 계속해서 발굴중인 진시황릉의 주인? 분서갱유? 만리장성?

 

아마도 진시황제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그 정도에서 멈출 것이다. 진시황제는 이름 그대로 ‘최초의 황제’를 뜻한다. 진시황제는 춘추전국시대(BC 770-221)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로, 진나라의 왕이었다. 그는 자신의 업적이 대단하다고 여겨 전설로 내려오는 군주인 삼황오제에서 따와 ‘황제’라고 칭했다.

 

사실 진시황제의 업적은 대단하긴 하다. 진시황제 이전까지 중국의 역사가 없는 건 아니다. 하-은-주의 세 왕조가 등장하긴 하나,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을 살펴볼 때 중앙집권이 아니라, 거의 이름만 ‘천자’이고 결국 각각의 제후가 실질적으론 다스리는 지역의 왕인 지방분권상태였다. 따라서 진시황제의 출현과 더불어 중원대륙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최초의 중앙집중형 왕조가 탄생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진시황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이전까지는 일곱 나라의 말과 글 그리고 도량형이 달랐다. 특히 글자의 경우 너무나 복잡하고 달랐는데(특히 조나라 글씨가 복잡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진시황제는 이를 간단하게 바꿔서 통일시켰다. 또한 한비자의 법가사상을 받아들여, 이전과 달리 엄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우린 흔히 진시황제 사후 진나라가 멸망해버렸기 때문에, 진시황제의 업적에 대해 무시하거나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뒤이어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의 경우 진나라의 정치-경제 체제를 그대로 모방했고, 그 후 중국왕조는 진시황제를 모범으로 삼았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중국을 20세기에 재통일한 공산당의 수장인 마오쩌둥에 대한 현대중국인의 인식이다. <현대중국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마오쩌둥이 왠지 진시황제를 많이 닮았다고 여겼는데, 현대 중국인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마오쩌둥은 1893년 빈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서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중국대륙을 통일했다. 당시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1945년 당시 중무장 162만, 경무장 208만명으로 엄청난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공산당의 경우 중무장 16만6천, 경무장 15만4천명으로 숫자상으론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국민당의 심각한 내부 부패와 심각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장제스의 지나친 욕심과 비전 부재 등이 맞물리면서, 중국공산당에게 틈을 줬다. 마오쩌둥은 이를 놓치지 않고 농촌에 들어가 인심을 얻고, 국민당에게 세가 불리할 때는 10만리를 도망가는 대장정을 펼치면서 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끝에 중국을 다시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에 존경심이 대단하다. 개인으로서 그는 매우 부지런했고, 검소했단다.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살기 위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인 그는 동시에 자신과 당에 대한 비판은 절대 참지 않는 인물이었다. 1956년에 사상과 언론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齐放百家争鸣)(일명 백화운동)’은 결국 자신과 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자, 곧 금지하고 관련인사를 모조리 잡아 숙청하는 무시무시한 인사를 단행했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진 영국이 산업혁명을 이룬 것처럼 중국도 하겠다며 ‘대약진’운동을 펼치지만, 제대로 된 사전조사나 계획 없이 이루어진 탓에 무려 4천만명이 넘는 아사자를 발상하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대약진 운동이후 잠시 주석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1966년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이후 10년간 계속되며 무려 2천만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공자의 비석이 파괴될 정도로 철저한 문화유산으로 파괴되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다(제 2의 분서갱유라 일컫어 진다). 결국 1976년이 되어서 공산당에서 ‘종료’선언을 할 정도에 이른다.

 

마오쩌둥은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을 참지 않았다. 그의 평생 동지였던 린뱌오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해놓고도, 자신의 지위를 넘본다는 의혹이 풍기자 제거했고, 덩샤오핑 역시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자 두 번이나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죽을 때까지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누구보다 순수하게 공산주의 이념을 펼쳤다는 점에서는 중국인은 그를 인정하고 존경하기까지 한다. -물론 여기에는 문혁기간동안 그의 말을 마치 성경처럼 신봉시킨 탓도 크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나름 선의로 시작한 일도 당시 중국의 경제를 퇴보시키고,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수천만명의 사상자와 아사자를 발생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자주 말하는 ‘나쁜 결과로 끝난 일도 그 출발은 선의에서 비롯되었다’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잠시 화제를 전환해서, 1973년 8월 제 10차 당대회때 공자에 비판이 격렬해졌다. 이유는 공자가 당시 새로 떠오른 봉건지주와 그들의 지지세력인 법가를 싫어했던 몰락한 노예 소유 귀족의 대표인물로 치부한 탓이다.

 

상대적으로 분서갱유까지 저지른 진시황제에 대해선 ‘지주계급의 독재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재밌는 것은 1976년 4월 4일 죽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모인 군중들이 경찰과 충돌하게 되자, ‘진시황의 통치는 이제 끝났고, ‘진정한’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복귀해야 한다’는 외침과 현수막을 내걸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인들 역시 마오쩌둥에 대해 절대군주였던 진시황제처럼 중국을 통일하고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은 인정하지만, 제 2의 분서갱유를 일으킬 정도로 사상을 억압하고,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과 나라에 엄청난 희생(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안긴 탓이리라.

 

1981년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자 적당한 선에서 금을 그었다. 이는 그가 대인인 탓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중국공산당을 세운 마오쩌둥을 비난할 경우, (중국공산당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과 중국공산당은 1989년 천안문 앞에 모인 ‘민주화’를 요구하며 모인 군중에게 총격을 가하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약 700여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점에서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충실한 후계자라 할만하다. -당시 대규모 가두시위대에 맞선 상하이 제 1당 서기장이었던 장쩌민을 당의 수뇌로 승진시킨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그 자신이 마오쩌둥에게 당한 일을 똑같이 반복했으니 셈이니 말이다-

 

현재의 중국공산당은 전 세계에 88개국에 공자학원을 개설했을 정도로, 공자에 대한 열기가 뜨겁다. 그러나 지난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공산당이 보여주는 모습은 공자보다는 그들이 1973년 때 칭송해마지 않던 진시황제와 더 가까워 보인다. 진시황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진나라는 진시황의 사후 멸망했지만,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사후에도 계속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몹시 불안해 보이지만 말이다.

 

참고: 조나선 D 스펜스 저 <현대중국을 찾아서 1,2>,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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