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선 오늘날 한층 발달한 CCTV에 관해 소개되었다. 일반 CCTV보다 다섯 배 이상 고화질을 보여주는 HD CCTV가 등장했고, 특정 지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고화질로 저장하는 가 하면, 학교 앞을 배회하거나 가방 놓고 가는 특정 행동을 인지해서 경고음을 알려주는 ‘인공지능형’ CCTV 등이 등장했다. 미드에서나 봤을 법한 최첨단 CCTV는 앞으로 각종 범죄를 예방하거나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너무 선명한 CCTV는 인근 지역 주민들의 사생활을 노출시키고, 지나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모두 찍는 CCTV들은 마찬가지로 대다수 시민들을 행적을 노출시키는 데서 큰 문제를 발생시킨다. 아무런 생각없이 길거리를 다니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동의 없이 내 사생활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것이니까. 물론 각각의 CCTV는 사생활보호를 위해 아파트 창문가는 흰띠로 가린다거나, 경찰관이 보기 전까진 절대 직원이 정보를 열람할 수 없도록 규정을 두곤 있었다.
그런 조치로 ‘사생활 침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는 각종 강력범죄로 인한 논란과 공포 때문에, CCTV 설치를 오히려 구청에 요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찬성률 100%라는 말도 안 되는 공산당식 호응엔 ‘공포’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사생활은 조금 침해돼도 상관없으니, 범죄자를 꼭 잡으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런 CCTV가 자꾸만 설치되는 것은 정말 옳은 일일까? 이런 방송을 보다보면 우린 쉽게 딜레마에 빠진다. 우리의 자유나 사생활이 침해돼도 CCTV가 설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자유를 지키기 위해 CCTV 설치를 반대해야 되는가? 로 말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틀린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다른 곳에 있다. 그건 우리가 서로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CCTV는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의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셜록 홈즈조차 친구이자 조수인 왓슨에게 ‘범죄가 발생하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다’며 자신의 무능력함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SF영화인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거기서 몇 걸음을 훌쩍 뛰어넘어가서, 범죄를 미리 예언해서 범인을 잡아내는 ‘프리크라임’ 시스템을 선보인다. 세 명의 예언자가 범죄를 미리 예견하는 이 시스템을 통해 그 지역의 범죄율은 0%라는 기적적인 수치에 이르게 된다.
영화는 그런 프리크라임의 수장인 존 앤더튼(톰 크루즈)이 가까운 미래에 범죄를 벌인다고 예언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이에 앤더튼은 한명의 예언자가 다른 두 사람의 예언과 다른 미래를 말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찾아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뛰어다니게 된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필립.K.딕의 동명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범죄를, 그 사람이 미래에 저지른다는 이유만으로 체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것이 비록 범죄율 0%를 약속한다고 해도?’ 이것은 금방 생각해봐도 ‘아니다’라고 답변이 바로 나온다. 실제로 영화와 소설 모두 각각 의미 있는 결말을 맞이한다-영화와 소설 모두 괜찮기 때문에 추천하는 의미에서 결말은 인용하지 않겠다-
비록 프리크라임처럼 예언자적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린 이미 다른 방법으로 범죄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다. 가령 예를 들어 XXY 염색체를 지닌 사람들(일명 ‘클라인펠터증후군’)이 다른 이들보다 범죄율이 높다는 주장이 과학자들에 의해 미국에서 1960년대 제기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유영철 같은 희대의 흉악범이 등장하면서 인터넷에선 ‘싸이코패스 테스트’라는 것이 유행했었다.
‘싸이코패스’는 나쁜 짓을 하고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이들로 전체 인구의 2-3%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러나 클라인펠터증후군은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다른 의견들이 개진되었고, 싸이코패스 역시 ‘교육’등을 통해 얼마든지 범죄자가 되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다.
범죄란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서로 다투거나 싸우고 심지어 칼부림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고도로 정보화-산업화 되면서 우린 바로 이웃집과 인사하는 일조차 드물게 되었다. 종종 뉴스를 통해 우린 이웃끼리 (도둑이나 강도로) 오해해서 한밤중에 싸우다가 한쪽이 사망하는 불행한 결과를 종종 목도하게 된다.
길가는 사람을 그냥 죽이는 일명 ‘묻지마 범죄’ 역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이런 새로운 유형의 범죄들이 생겨나고, 이전보다 범죄가 잔인하고 흉악해지는 것은 인간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어서가 아닐까? 이전보다 분명 문명을 발달했지만, ‘돈이 최고’라는 의식으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신경 안 쓰고, 내 아이만을 생각해서 모든 것을 해줘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1등외엔 모두가 패배자로 만드는 사회에선 상실감과 패배감 등에 의해 범죄자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아무리 범죄자를 극형에 처해도 근본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범죄’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저 범죄가 무서워서 CCTV등의 도움을 빌리려 한다면, 그건 우리 스스로를 ‘예비 범죄자’로 인식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고, 이것은 훗날 다른 식으로 다른 이(혹은 무언가)에게 권력을 넘겨 우리를 통제하는 빅브라더 시대를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마치 모두에게 ‘슈퍼컴퓨터에게 우리를 심판하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다들 ‘절대 안돼!’라고 말하지만,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사람의 생활패턴을 보고 예비범죄자를 가려내는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요?’엔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세 개는 싫고 네 개는 좋다는 원숭이와 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 - 물론 흉악 범죄는 무섭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손쉬운 방법이 꼭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말하고 싶다. 아울러, 우리가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 남기 위해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된다는 사실 역시 강조하고 싶다. ‘인간은 어떤 순간에도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칸트의 외침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더욱 의미 있는 잠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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