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너무나 비싼 정의 DVD, 이게 최선입니까?

朱雀 2011. 1. 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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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EBS에선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특강인 <정의>가 종강했다. 총 12강에 이르는 <정의>는 밤 11시 10분이란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1%를 넘기며 화제를 모았다. 게다가 DVD로도 출시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뻐서 홈페이지를 찾아서 봤다가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기엔 무려 ‘15만원’이란 가격표가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 숫자를 잘못 읽었나하고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허사였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김주원이 강림하고 말았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내가 분노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 EBS가 공영방송이란 사실이다. 만약 사기업이었다면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EBS는 국민이 낸 수신료의 일부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그런데 이런 무시무시한 가격표를 붙이다니.

 

두 번째는 컨텐츠의 내용 때문이었다. <정의>의 내용이 무엇인가? 제목 그대로 ‘정의’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은 하버드생 앞에서 공리주의-자유지상주의-칸트의 도덕론-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정치-공동체주의 등을 역설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케 한다.

 

이전까지의 강의와 달리 <정의>는 나랑 전혀 연관 없는 철학들이 어떻게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려준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사실은 미국인들이 신봉하는 자유지상주의 철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실은 다른 철학 간의 대결이란 사실을 알게 해준다.

 

또한 샌델은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하는 가? 시장에서 합의는 어떻게 맺어야 하는가? 최고의 도덕원칙은 무엇인가?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정의로운 분배원칙은 무엇인가? 등등 우리가 살면서 자연스럽게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딜레마를 제시하며 하버드 학생들을 고민케 한다. 이는 시청자인 우리에게도 당장 내 삶과 연관되는 것이라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만약 한명을 희생해서 열명을 살릴 수 있다면, 한명을 희생해도 되는가? 성적이 아니라 국가 구성원 중에 소수라는 이유로 우대받아도 되는 것인가? 무상급식은 정말 포퓰리즘에 근거한 인기영합주의의 정책인가? 등등을 고민케 한다.



 


무료로 <정의> 강의를 볼 수 있는 academicearth.org과 요금을 내야하는 EBS

 

따라서 정의 DVD는 상당히 저렴한 값에 모든 이들이 볼 수 있게끔 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http://academicearth.org 에서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접속해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를 비롯한 명강의를 '공짜'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들은 소개란에서 ‘전 세계 모든이들이 와서 무료로 세계적인 수준의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하고, 이를 통해 함께 발전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라는 식의 취지를 적어놓았다.

 

반면 EBS는 어떤가? 홈페이지를 접속해서 ‘다시보기’를 들어가면 1M 고화질은 편당 8백원, 300K 저화질은 편당 3백원을 받고 있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EBS는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졌고 운영되고 있다. 물론 매년 2-300억원의 적자를 내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적자는 다른 방식으로 메워야 하며, 다른 것도 아닌 <정의>를 가지고 15만이나 하는 가격표를 메긴 것은 아무리 봐도 ‘장사’라고 밖엔 보이질 않는다.

 

저작권료를 얼마나 지불했고 내부사정이 얼마나 나쁜지 잘은 모르지만, <정의> DVD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많이 볼 수 있도록 보다 현실적인 가격을 책정해야 했다. 만약 좀더 사려 깊었다면 재질을 떨어뜨려서라도 저렴한 ‘보급판’을 만들어서 <정의>를 보고 싶어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옳다!

 

누군가에게 15만원은 별것 아닌 돈일 수 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겐 너무나 큰 돈일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는 이런 식으로 반박할지 모르겠다. “재방송을 하니까 그걸로 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인터넷을 뒤지면 한글자막이 붙은 공짜 동영상이 있을 거다. 그걸 봐도 무방하지 않느냐?”

 

얼핏 들으면 귀가 솔깃하지만 생각해보면 안 되는 말들이다. 우선 ‘재방송’은 정해진 시간에 하기 때문에 갑작스런 사정으로 보기 어려울 상황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정품’으로 나온 <정의> DVD를 ‘어둠의 통로’를 통해 보라고 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선 예약자에 한해선 정가보다 3만원 저렴한 12만원에 구입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가격은 국내 여건이나 제반사항을 따져봐도 비싸며, 미국에선 무료로 볼 수 있는 강연 동영상을 국내에선 (비록 적지만) 돈을 내고 봐야 현실을 고려하면 이래저래 씁쓸해진다.

 

<정의>는 우리가 오늘날 맞닥드린 현실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행동해야 할지 촉구한다. 이런 강연 DVD를 10만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 뭔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당신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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