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선덕여왕’ 최고의 미스 캐스팅은 누구인가?

朱雀 2009. 11. 25. 09:01
728x90
반응형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계백의 등장. 제작진의 탓인지 연기자의 문제인지 도통 그의 첫 등장은 별다른 임팩트가 없었고, 이후 행동도 그가 <선덕여왕>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잡을 예감이 전혀 들지 않게 보였다. 부디 내 이런 첫인상이 틀리길 바랄 뿐이다. 싫든좋든 앞으로 최소 8화 동안 그를 봐야 하니까 말이다.



54화에선 예고한대로 계백 장군이 등장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겨우 5천 결사대로 유신의 5만 대군을 수차례 이긴 장본인. 아마 백제 역사상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위인인 그는 그러나 드라마상의 첫 등장은 별로 인상적이진 못했다.

사실 최원영이란 신예가 ‘계백’역을 맡는다고 할 때부터 큰 기대를 받진 못했다. 그가 출연한 전작들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의 마스크가 전체적으로 무던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계백의 첫 등장이 실패라는 생각은 이전에 비담이 첫 등장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쫓기던 덕만과 유신 앞에 나타난 비담은 별다른 대사 없이 기지개를 피면서 나타났는데, 그 자체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게다가 무협지나 무협만화등에서 갓 튀어나온 듯 행동하는 그의 캐릭터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자아냈다. 비담은 적어도 50부까지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의 200% 이상을 해냈다고 여겨진다.

‘미실의 부재’는 현재 <선덕여왕>의 극중 긴장감과 전개감을 대폭 사라지게 했다. 미실을 대신해 신라를 지배하는 덕만은 이제 ‘폐하’로 불리며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건만,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은 ‘미실’에게서 자유롭지 못하고 뭔가 겉돌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평균 40%대의 시청율을 기록하는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 이렇게 ‘선덕여왕’이란 캐릭터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무척 드문 케이스라 흥미롭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현재 <선덕여왕>에서 안타깝게도 ‘선덕여왕’이란 역사속 인물은 사라져버렸다. 이는 1차적으론 제작진의 문제다. 미실이란 캐릭터 구축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여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내야 할 선덕여왕은 안타깝게도 미실의 안티테제로만 극중에서 존재했다.

따라서 미실이 사라진 지금 선덕여왕이란 캐릭터의 정체성은 상당히 모호해져 버렸다. 미실에겐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신라가 발전하지 않았다”고 뼈있는 지적을 했지만, 미실이 마지막에 신라를 위해 자살하는 걸로 끝냈음로써 미실은 왕이 아님에도 왕을 넘어서는 불멸의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반면, 미실의 대척점에 서있던 덕만은 미실을 ‘반대하기 위한 반대 캐릭터’로 일관함으로써 그녀가 (미실에게)한 행동과 말이 어긋남으로써 정체성을 쌓는데 실패했다. 미실이 스스로 자신의 약점을 고민하고 이를 극복하는 성장형 캐릭터가 되어버림으로써, 미실이란 거대 적에 맞서 성장해야 하는 덕만이란 캐릭터가 묻혀버리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해버린 것이다.

이는 카리스마 넘치고 통찰력 있고 매력적인 악당이 ‘성장’이란 주인공이 가진 유일한 무기마저 빼앗아 가버림으로써, 덕만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매력이 없는 희한한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제작진은 또한 중요인물인 김유신 캐릭터 구축에도 실패했다. 삼국시대 인물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많이 알려진 캐릭터는 누가 뭐래도 ‘김유신’이다. 그 어떤 전쟁에서 한 번도 진적이 없는(전투에선 몇 번 진적이 있어도 전쟁에서 그가 진 적은 없는 걸로 안다) 김유신은 ‘전설’ 그 자체다.

<선덕여왕>은 그런 김유신을 ‘우직함’으로 시종일관 그려냈다. 아마 비담이나 춘추처럼 내내 모든 상황을 분석하고 이를 자신의 마음대로 제어하고자 하는 ‘정치적 인간형’과 다른 인간형을 하나쯤 그려내고 싶은 욕심탓이리라. 그리고 초지일관 순수함을 간직하고 ‘2인자의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를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몇 장면에서 김유신은 빛났다. 특히 원리원칙을 준수하며 ‘풍월주’가 되기 위해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치는 그가 원세화 칠숙에 맞서 싸울때는 영화 못지 않은 긴장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50화가 넘은 지금, 전체적으로 조망했을 때 김유신이란 캐릭터는 잘못 구축된 대표적 캐릭터라는 게 내 의견이다. 이유는 상황에 그의 행동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주 방영된 53-54화를 보면 느꼈겠지만, 비담이 교묘히 펼쳐놓은 함정에 빠진 유신은 선택을 강요받았다. 자신의 세력 기반인 복야회를 일망타진하던가, 아님 복야회의 추대를 받고 왕이 되던가. 김유신은 복야회를 잡지도 않고, 선덕여왕의 신하의 길을 올곧게 걸어감으로써, 제 3의 길을 택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이는 이상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정치적 행동과 입장을 취하는 ‘정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의 행동을 납득하기란 무척 어렵다. 물론 논리적으론 유신은 자신의 입장이나 영달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옳은 길’이라 믿는 쪽으로 우직하게 나아가는 일관성과 대사를 함으로써 시청자에게 감명(?)을 주긴 한다. 이는 좀 생각해보면 엄청난 모순에 빠진다.

53화에서 선덕여왕은 비담과 월야의 함정에 빠져 파옥했다가, 자신이 발로 찾아옴으로써 ‘정치적 생명’이 끝장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한다. 선덕여왕은 혼잣말로 ‘고맙다’고 하지만, 이후 상황은 그녀가 유신을 유배형에 처함으로써 처단하는 형국을 취한다. 물론, 이는 비담 등이 지적하지만 사량부의 격을 낮추고, 복야회를 잡게함으로써 훗날 유신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긴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이런 방법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는가?

그렇다! 미실이 많이 쓰던 방법이다. 52-54화까지 비담은 ‘짝퉁 미실’이 되었다. 그는 미실의 측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고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면서 음모를 꾸미고 이를 주도면밀하게 실행함으로써 ‘악의 축’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머리를 치는 것은 미실의 안티테재로서만 존재한 덕만 역시 선덕여왕이 되어 지극히 ‘미실’스러운 방법으로 비담과 유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짝퉁 미실’이 비담과 선덕여왕의 둘로 늘어난 지금의 형국은 참으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형세가 되어버렸다.

다시 유신이란 캐릭터로 돌아가서, 원리원칙을 지키는 유신이란 캐릭터는 머리 또한 영민한 캐릭터다. 하긴 전장에 나가 져본적이 없는 장수가 정치적 감각이 없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김유신은 몰라서가 아니라, 모든 상황이 어찌될 것인지 알면서도 ‘어려운 길’을 걸어감으로써 스스로의 캐릭터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2인자는 1인자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삶이자 존재다. 현재 김유신이 보여주는 행보는 나름 멋지다. 그러나 여왕이 정치적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고 올곧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위기에 처하거나 주군이 궁지에 몰리게 된다면 원칙에 반하는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물며 선덕여왕은 그에게 ‘정인’이다.

또한 김유신이 택한 ‘2인자의 삶’이란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다. 월야를 필두로 복야회가 ‘가야의 왕’이란 이상에 사로잡힌 것과 달리, 유신은 가야란 나라가 없어진지 80년이 넘었음으로써 신라의 일원이 되어 누구보다 앞장서고, 1인자가 되기 위한 욕심을 버리고 2인자의 길을 택함으로써 자신과 가야가 신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인물이다.



이런 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인물이 ‘이상’을 위해 눈 앞의 현실을 버리고, 자신과 가야계 모두가 공멸할 수 있는 선택을 올곧게 해나간다는 건 실로 엄청난 자기모순이다. 선덕여왕이 말했지만 군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지만 ‘복야회’는 가야가 아니다. 가야 60만의 생존을 위해 복야회를 희생할 줄 아는 게 오히려 현실적인 게 아니었을까?

이런 식의 생각을 거듭해보면 화랑이었을 땐 나름 멋지던 유신 엄태웅이 위기순간엔 왜 그리 멍때리는 지 이해가 갈 수 밖에 없다. 연기자 자신이 본인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으니, 몰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2인자의 삶을 택하는 현실적인 그가 모두가 죽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악의 선택을 그것도 알면서 스스로 걸어간다는 건 자가당착이다. 지금 제작진은 김유신에게 그런 오류에 빠뜨려 버린 것이다.

덕만이 아닌 미실을 여왕으로 만들어 놓고, 현실적인 유신을 이상을 위해 행동하는 갈팡질팡형 캐릭터로 만들어놓은 <선덕여왕>. 미실의 부재 이후 재미가 없어지는 건 그런 면에서 매우 당연하다 여겨진다.

다음 메인에 소개되었습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