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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13

중국은 과연 존재하는가? ‘차이나는 도올'

조금 도발적인 제목을 달아보았다. 어제 ‘차이나는 도올’에서 도올은 ‘중국은 있나?’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도올의 말처럼 19세기만 해도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나라가 있을 뿐이다. 두번째 질문은 더 난감하다. ‘공자가 중국 사람인가?’ 그리고 결론을 내린다. 공자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노나라 사람이었다. 노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작은 도시국가 중에 하나였을 뿐이다. 따라서 공자는 오늘날의 개념인 중국이란 틀로 대입하면 중국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오늘날의 개념으로 역사를 논한다는 것은 상당한 오류의 가능성을 안을 수 밖에 없다. 도올이..

TV를 말하다 2016.04.25

도올 김용옥, 마이클 샌델의 ‘정의’를 비판하다!

이번주 ‘중용’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 교수는 에 대해 일침을 놓았다. 물론 정확히 마이클 샌델이란 이름이나, 란 책제목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서구가치인 ‘정의’를 운운한 것은 누가봐도 작년 우리사회를 휩쓴 ‘정의열풍’에 대한 따끔한 질책이었다. 도올은 이란 텍스트에서 인간이 행동지침을 아래와 같이 주었다고 말했다. 1) 묻기를 좋아하고, 2) 가까운 말들을 살필 줄 알아야하고, 3) 될 수 있는 한 자신과 남의 좋음 점은 드러내주고, 추한 면은 덮어주고 4) 항상 인간의 모든 극단적인 면을 고려해서, 극단에 빠지지 않고 그 중(中)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면서 도올의 말은 이어진다. 서양에서는 정의란 실체를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전에도 지적했지만, 정의라는 개념은 인간의 머릿속에서만 존..

TV를 말하다 2011.10.26

공자가 소크라테스보다 위대한 이유, ‘중용, 인간의 맛’

얼핏 보면 ‘태권브이와 마징가제트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수준의 유치한 질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강의를 보면서 새삼 동양철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알기에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가 철저한 신앙인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와 강의를 보면 그가 철저한 신앙인이었다고 나온다. 하루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이 나왔는데, ‘아테네에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듣기에 따라선 매우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로선 난감한 고민에 휩싸였다. 그는 철저한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과 무지함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었다. 하여 그 신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는 신탁을 ..

TV를 말하다 2011.10.20

삼봉 정도전이 꿈꾸던 조선은 어떤 나라였을까?

어제 방송된 에선 삼봉 정도전의 조카인 정기준이 등장해서, 어린 이도를 향해 ‘네 아버지가 삼봉의 조선을 도적질했다고 힐난했다’. 얼핏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나라다. 따라서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나라가 맞아 보인다. 그런데 왜 어린 충녕대군은 그의 말에 한마디 대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일까? 안타깝지만, 자신의 아버지 태종이 정도전의 나라를 도적질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봉 정도전이 꿈꾼 조선은 어떤 나라일까? 서구유럽이 이상적으로 꿈꾸는 나라는 그리스에 위치한 도시국가 아테네다. 그곳에선 시민들이 아침부터 아고라에 모여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시민들 모두가 정치현안에 대해 직접 투표를 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초기형태의 민주주의다. ..

TV를 말하다 2011.10.13

중국은 왜 100억이나 들여서 ‘공자’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지난 26일부터 중화TV에선 35부작 드라마 가 방송하고 있다. 3회까지 밖에 못 보았지만, ‘상당히 볼만하다’고 평하고 싶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는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이야기 전개에도 현대적 입맛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티가 역력하게 난다. 게다가 우연인지 최근 EBS에서 이 방송중인 탓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욱 그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는 이라면 “왜 2천년전 인물인 공자를 최첨단 시대에 사는 내가 알아야하지?”라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좋은 질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해선 반드시 MUST 절대적으로 ‘공자’를 알아야만 한다. 공자의 사상은 지난 2천년간 중국은 물론 한자문화권에 속한 아시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TV를 말하다 2011.09.30

태평천국은 언제부터 청나라와 맞서게 되었는가?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우리가 흔히 ‘태평천국운동’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1850년쯤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징조’는 있었다! 홍수전과 그의 일행들은 전도를 하는 과정에서 1845년 자신들을 ‘배상제회’ 즉 ‘하나님을 숭배하는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의 세력권은 점차 넓혀나간다. 지방의 신사층은 배상제회에 반발하고 나선다. 조상신을 거부하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신사들은 시시때때로 명분을 만들어 배상제회의 신도들을 고발하고, 홍수전과 그 일행들은 그들을 풀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초창기에는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았지만, 점차 커져가는 배상제회의 세력에 위협을 느낀 지방 신사층과 지방관들은 더욱 단호하고 모질게..

홍수전은 어떻게 신도를 늘려나갔을까?

태평천국의 창시자 홍수전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홍수전이 이름을 바꾸고 바로 전도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거듭된 낙방에 호구지책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내고 있었다. -홍수전이 적극적으로 전도여행을 떠나기까진 7년이 더 흘러야했다- 그러나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권세양언’에서 본 것과 너무나 비슷했다.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대포를 비롯한 신무기로 청나라의 물을 억지로 활짝 열어젖혔다. 신무기의 어마어마한 위력은 성경(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말세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한번 상상해보자! 서양의 범선에서 대포가 불을 뿜으면서 벼락같은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집과 성채는 하늘높이 치솟았다가 떨어진다. 만약 그게 사람이라면? 더욱 끔찍한 결과가 이어진다. 양..

황제, 드디어 민족시조로 등극하다!

황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중국 지식인 사회는 한 가지 문제를 놓고 서로 ‘박 터지게’ 논쟁하게 된다. 바로 중국의 시작을 황제로부터 잡는 ‘황제기년’을 쓸 것인지, 아니면 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자 때부터 잡는 ‘공자기년’을 쓸 것인가? 하고 말이다. 황제기년을 쓸 경우, 중국의 역사는 약 5,000년 정도로 소급된다. 이렇게 될 경우 아편전쟁을 일으킨 이후, 중국 전역을 먹이감으로 삼은 서구 열강들보다 훨씬 긴 역사를 지닌 것이 된다. 지식인들이 신화속의 존재에 불과한 황제를 1900년대에 다시 되살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마천이 모든 중국왕조의 시조로 선택한 ‘황제’는 황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 사이에선 거의 이야기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황실을 위한 ..

중국은 왜 공자를 부정했는가?

산동성의 공자묘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현재 중국은 약 88개국에 공자학원을 세울 정도로 적극적으로 ‘공자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우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공자의 3천명의 제자들의 장엄한 의식을 통해 ‘공자의 부활’을 화려하게 이미 경험한 바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1973년 공자가 몰락한 노예 소유 귀족의 대표인물이라며 제 10차 당대회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으며, 그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현의 묘비가 홍위병에 의해 두동강이 났던 일을 돌이켜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것에 버금갈 만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할렐루야! 물론 공자의 복권은 1976년 덩샤오핑의 복귀와 함께 어느 정도 이루어졌으며, 차츰 권위를 더하더니 마침내 2000년대가 되면 더욱 활발하게..

왜 중류는 없을까?

카라와 소녀시대가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중국을 비롯한 태국-베트남 등의 아시아권에서 한류의 뜨거운 인기를 보면서 입에 퍼지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막상 나는 그런 한류열풍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그저 한국인이란 이름으로 즐겁고 더없이 자랑스럽다. 여기에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등 다양한 감정이 작용할 것이다. 1980년대 홍콩영화 전성기와 1990년대까지 꾸준하게 일본방송-영화-게임-애니메이션-가요 등의 영향을 꾸준하게 받아온 한국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한류는 사실 10년 전만 해도 상상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룡의 액션과 주윤발의 쌍권총과 바바리 외투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우리가 역으로 문화를 수출하는 날이 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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