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공연 전시

왜 지금 ‘레미제라블’인가?

朱雀 2012. 12. 2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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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필자 역시 대선이 끝난 이후로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눈물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보내고 한 지인으로부터 영화 <레미제라블>을 추천받았다. 영화를 보았고 결말부에 한줄기 뜨거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연극 레미제라블을 보러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잘 아는 이가 출연한 탓도 있었지만, 영화와 다른 느낌을 연극으로 통해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뮤지컬 형식을 취하고 있고, 휴 잭맨-러셀 크로우-앤 해서웨이, 아만다 사이프리드 같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따라서 영화가 전해주고자 애쓰는 메시지가 그런 화려한 출연진에 조금 가리는 면도 있다.

 

그러나 연글 <레미제라블>은 조금 다르다! 연극은 영화처럼 사람의 마음을 일부러 격동시키려 애쓰거나 일부러 하이라이트를 끌지 않는다. 오히려 ! 이 장면을 조금 더 끌면 좋을텐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끝낸다.

 

따라서 연극 <레미제라블>이 주는 감동은 영화와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우리에게 <레미제라블>은 주인공 장발장의 이름으로 친숙하다. 어린 조카들을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친 장발장을 3년형을 언도받고 탈옥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엔 19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다.

 

억울한 옥살이와 전과자로 낙인찍혀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 때문에 그는 점점 더 최악의 인물이 되어간다. 아무도 재워주지 않으려는 그를 재워준 이는 놀랍게도 미라엘 주교다! 그는 그를 위해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주지만, 배은망덕하게도 장발장은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난다.

 

결국 장발장은 잡히지만, 미라엘 주교는 뜻밖의 행동을 한다. 은식기를 훔친 그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주는 성자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사실 이건 머리로 이해하기 쉬운 일이다. 미라엘 주교는 상처받은 그의 영혼을 보았다. 억울한 옥살이와 자신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장발장은 화가 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장발장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는데, 그 세상에 화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미라엘 주교는 자신의 선행이 그의 영혼을 지옥에서 꺼내서 천국으로 인도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거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간은 배신을 당하면 그를 응징하고 싶어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응징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의 눈빛으로 바라봐 주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머리론 이해해도 행동으로 옮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 못지 않게 불쌍한 인물은 팡틴이다! 그녀는 한 부잣집 도령을 사랑했지만, 그는 그녀를 버렸고, 아기를 임신한 팡틴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방직공장에서 일한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를 시샘한 동료 방직공에 의해 그녀가 아기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는 쫓겨난다. 그 후 사랑하는 코제트를 키우기 위해 머리를 자리고 이빨을 뽑고 그것도 부족해서 거리의 창녀로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눈물겹다.

 

자신의 딸 코제트를 위해 한없이 희생하는 팡틴의 모습은 미라엘 주교와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물론 한없이 고귀하고 성스러운 미라엘 주교와 모습과 팡틴의 모습을 바로 비교하기에는 분명히 거부감이 있다. 또한 일면식도 없는 장발장을 위해 은촛대까지 내주는 주교의 모습에 비해, 딸 코제트를 위해 희생하는 팡틴의 모습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생계 때문에 아이를 버리는 것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버린 세상에서 팡틴의 희생을 함부로 말하기란 쉽지 않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은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 민초들의 삶이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장발장이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한조각을 훔칠 수 밖에 없는 생계형 범죄는 오늘날 굶주인 아기를 위해 분유를 훔치는 엄마를 쉽게 뉴스에게 볼 수 있어서 그건 소설에서나 있는 일이야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만든다.

 

장발장도 그렇지만 팡틴의 끝없는 희생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레미제라블>의 시대적 배경은 프랑스 혁명이다!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이들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코제트가 나중에 부잣집 도령인 마리우스를 만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어머니 팡틴과 아버지격인 장발장의 희생이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방직공딸인 코제트가 마리우스를 만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분상승이며, 오늘날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이 재벌남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에선 서로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가난한 이과 부자가 서로 화해를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레미제라블>에선 사랑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빅토리 위고는 굳이 사랑이야기를 많이 넣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혁명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투쟁심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다. 인류애는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바로 가정에서 받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커서는 이성을 만나 불같은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가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하고 심지어 죽음도 불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에선 혁명과 같은 대의를 앞두고도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리우스의 모습을 굳이 넣은 게 아닌가 싶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엔 미라엘 주교 같은 성자부터 테나르디에 같은 사악한 인물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큰 인상을 주는 인물로는 자베르를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자베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법을 중요시하고 항상 법집행을 공평하게 하고자 애쓴다. 그는 마들렌 시장을 장발장으로 의심하고 경시청에 의뢰해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진범이 잡혔다는 소리에, 시장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파면을 요구할 정도로 강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법집행엔 인정이 없다! 따라서 그의 준법정신은 분명 훌륭하긴 하지만 동시에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이의 사정과 시대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법과 죄만 따지는 그의 모습은 끔직하지 않은가?

 

연극 <레미제라블>은 서두에 밝힌 것처럼 영화 <레미제라블>과는 다른 관람의 맛을 제공하며, 좀 더 깊이 오늘날의 우리에 대해 사색하게끔 만든다. 프랑스 혁명은 성공하기까지 많은 실패와 희생이 있었다. 그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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