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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3

히틀러는 왜 소련침공에 실패했는가? ‘뉴전사’

‘뉴전사’ 16회에선 독소전, 정확히는 모스크바 공방전을 다뤘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빨리 서유럽을 석권한 히틀러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여기엔 스탈린이 군부에 대한 대숙청을 단행한 게 컸다. 장교단 8만명 중에 3만 명이 숙청당했다! 그냥 봐도 무시무시한 숫자인데, 전쟁영웅이거나 전투수행능력이 있는 우수한 군인들을 최우선 대상으로 숙청했다. 전투 부대의 근간인 연재당은 무려 50퍼센트가 숙청당했다. 그냥 봐도 제대로 군이 제대로 돌아갈 일이 없었다. 결국 당시 히틀러의 독일은 오판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독일의 계산이 비틀어졌을까? 우선 소련은 개전 열흘 만에 무려 530만 명을 동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히틀러를 만들었다?

최근 5권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접하게 되었다. 우드로 윌슨의 고집 때문에 독일의 경제가 휘청거렸고, 이는 히틀러가 훗날 총통이 되어 정국을 휘어잡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사실 이었다! 이야기는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 1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드로 윌슨은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재위기간 중 미국을 벗어난 최초의 대통령이 된다. 그가 향한 곳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전승국 대표 70여명과 함께 전후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그는 1년 전 발표한 14개 평화조약이 이루어지길 바랬지만, 현실은 그의 이상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1919년 6월 28일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열강들의 잔치판으로 끝났다.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거기에 더해 ..

라디오가 없었다면, 루스벨트 대통령도 히틀러도 없었다!

최근 을 읽으면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바로 라디오와 관련한 부분이다. 1938년 미국의 라디오 보급률은 무려 80%에 달한다. 당시 라디오의 영향력은 사례를 보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라디오 드라마인 을 들은 청취자들은 실제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소방서를 비롯한 정부기관에 연락하고, 피난길에 나서는 등의 대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루스벨트 대통령은 잘 알다시피 소아마비를 앓은 탓에 하반신 불구였다. 지금도 자주 회자되는 말이지만 만약 루스벨트가 대통령 선거를 치룰 때 TV로 생중계했다면, 국민들은 그를 뽑지 않았을 것이다. -하반신 불구의 루스벨트에게 누가 표를 줬겠는가?-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목소리만 가지고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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